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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Oct 19. 2020

반가워요 Sopia Lee

Copyright 2020. 녹차 all rights reserved.





<Sopia Lee에 관한 연구 : '초록 나뭇잎' 작품에 대한 미학적 분석 기법을 중심으로>



Ⅰ서론


그 책은 상호대차 서비스로 빌린 책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5km 떨어진 도서관에서 우리 집 앞 도서관으로 장맛비를 뚫고 배송됐다. 책이 우리집까지 오는 동안 '이 물체'는 그 책을 구성하는 280여 페이지의 압력 속에 딱 붙어 있었다. 빌려온 지 며칠 후, 그 책, 『출근길의 주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출근할 일터가 없지만 궁금해서 빌려봤다. 반 정도 읽어나가자 책의 후반부에 응고되어 있던 종이 덩어리들이 조금 느슨해졌다. 낱장 틈으로 바람이 통했다. '어떤 물체'의 잠복이 끝날 참이었다.


"토독-!"

아 깜짝이야.


'어떤 물체'는 코팅된 나뭇잎 그림이었다. 뒷면엔 Sopia Lee라고 사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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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그냥 끼워놓을까? 내가 쓸까? 처분할까?'를 잠시 고민했다. 예전에도 도서관 책 속에 책갈피 같은 게 딸려온 적이 있다. 청구기호를 출력한 종이나 포스트잇, 성경 말씀이 적힌 종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책갈피 등 다양했다. 그것들을 그냥 끼워뒀는지 처분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단한 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게 자른 A4 이면지를 책갈피로 쓴다. 책갈피로 쓰려고 정성 들여 자른 건 아니다. 주 목적은 장 볼 목록을 적기 위한 건데 겸사겸사 책갈피로도 쓰는 거다. 내 책갈피엔 '피망, 두부, 콩나물, 가지' 같은 글자가 적혀있다. 나에게도 책갈피란 무심한 물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2020년에 수제 책갈피라니. 사람의 손을 타서 만들어진 비공산품, 오직 한 가지 용도만을 위해 만들어진,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책갈피이기만 한 물체가 내 앞에 떨어졌다. 게다가 소유주의 이름까지 새겨진 채.


도로 꽂아 두지 않는다면 그 날로 도둑이 될 것 같았다.


책갈피를 좀 더 세세히 살펴보았다. 나는 곧, 길에서 수 억이 든 돈 가방을 발견한 행인처럼 눈썹이 이마 끝까지 올라갔다. 이 정도의 책갈피를 분실함으로써 촉발되는 우주처럼 텅 빈 상실감이 가늠되었다. 머릿속이 일순 진공 상태가 됐다. 책을 재빨리 읽고 책갈피를 원위치시킨 후 서둘러 도서관에 반납해야만 했다. 이 책갈피를 조금만 더 감상하고 나서.







Ⅱ 본론


처음엔 그냥 사인펜으로만 테두리를 그린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사인펜을 대기 전에 먼저 연필로 스케치 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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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펜으로 덧 그린 후 연필선을 지우는 게 보통인데 Sopia 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남긴 모든 흔적에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는 듯하다. 여기엔 과거를 후회하거나 부정하는 태도는 설자리가 없다. 남겨진 얇은 연필선이 '당신의 모든 궤적들은 아름다우니 지울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검은색으로 그린 나뭇잎의 테두리는 진한 인상을 준다. 일정한 농도로 또렷이 그어진 적당한 굵기의 선에서 거침없는 힘이 느껴지면서도 뻣뻣하기만 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나뭇잎의 위쪽이 바람 탓에 살랑 넘어가는 리듬감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테두리를 그린 화구는 검정 사인펜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지 미궁이 있다. 수성 사인펜일까, 유성 사인펜일까? 나는 유성 사인펜, 흔히 말하는 네임펜이라는 데 무게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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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사인펜촉은 대체로 매끈하다. 하지만 네임펜 중엔 수성의 그것보단 다소 거친 것들이 있다. 소지품에 이름을 쓸 때 손끝에 전해지는 까끌 거림의 원천. 그래서 네임펜으로 선을 그을 땐 수성 사인펜의 물 흐르는 듯한 느낌이 덜하다. 종이와 마찰되다가 요철이 심한 불규칙한 지점들에서 방지턱을 넘듯 덜커덩거리게 된다. 사인펜이 주춤하는 지점에서 삼투압 현상이 몰리고, 잉크는 선을 그리다 말고 작고 동그란 점을 남기게 된다. 머무는 시간과 동그란 점의 크기는 비례한다. Sopia의 나뭇잎 테두리엔 바로 그런 미세한 점의 흔적이 즐비하다. 꽤 오래 머문 곳은 종이 뒷면으로도 사인펜의 잉크가 스며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갈림길이 생긴다. Sopia는 사인펜 사용이 익숙한가, 아니면 어색한가.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 법. 선의 중간중간에 맺힌 작고 동그란 점들은, 그 어떤 거친 펜촉으로도 빙판을 가르듯 선을 가지고 놀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천진스러운 표현, 마치 피카소가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고자 애쓴 것과 흡사한, 대가의 의도적인 가장일 수 있다. 반대로 그림이나 사인펜과 과히 친하지 않아서 종이와 사인펜의 충돌을 넉넉히 제압할 기술이 없었을 따름일 수도 있다. Sopia는 과연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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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두리 안쪽으로는 초록색을 칠했다. 놀라운 점은 다섯 가지 이상의 녹색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맨 아래는 비리디언, 다음 층은 아이스 블루 1/4 + 민트 그린 3/4, 그 위층은 비비드 그린, 맨 위층은 옐로 그린에 레몬옐로를 섞은듯한 아주 밝은 연둣빛에 군데군데 올리브그린을 칠해 놓았다.


현실의 많은 나뭇잎들은 초록이다. 하지만 흰색 무늬싱고니움, 아이보리색 황금 홍콩야자, 노란 은행잎, 주황 · 빨강 단풍잎, 분홍색 핑크스타, 보라색 사랑초, 검정 블랙 클로버처럼 다른 선택지들도 존재한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잎의 컬러 팔레트에서 Sopia는 초록을, 그것도 다섯 자루 이상 골랐다. 안전, 허락, 평화, 휴식, 젊음, 자연 등 온갖 좋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초록의 에너지를 Sopia는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나뭇잎 중엔 얼룩무늬, 줄무늬, 점무늬, 다양한 색감 등으로 개성이 또렷한 것들이 많다. 하지만 Sopia의 것처럼 층을 나눈듯한 색감의 그러데이션을 지닌 나뭇잎은 생소하다.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스마트 렌즈로 책갈피를 찍어 보니 어떤 유사한 나뭇잎도 검색되지 않았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같은 관념산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말랑한 상상으로 창조해 낸 관념의 나뭇잎인 것이다.

 

유사하면서도 다른 초록색들을 통해 Sopia가 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각각의 생명이 모여 단정하게 하나를 이룬 찬란한 무언가를 그려 본 것일까. 그렇게 세상의 다툼들에게 무안을 주려 했을까. 안에서 밖으로 점차 밝아지는 표현을 통해 절망을 벗어나려는 삶의 의지 같은 걸 키운 걸까. 아래에 무게중심이 되는 색을 놓고 위엔 가벼운 색을 칠하여 감상자에게 마음의 안정을 선물하려는 작은 친절을 수줍게 숨겨 둔 것은 아니었을까.


무수한 형태 중 왜 나뭇잎이었는지도 궁금하다. 소극적인 이유로, 적어도 Sopia가 나뭇잎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거다. 더 나아가면, 조금이라도 나뭇잎이나 식물에 호감을 가진 사람일 테다. 그렇지 않다면 하고많은 형태들 중 손목을 몇 번이나 꺾어가며 가위질을 해야하는 13각형에 버금가는 나뭇잎 모양을 선택하진 않았을 거다.


나뭇잎을 채색한 화구는 색연필로 추정된다. 연필형 색연필, 돌돌이 색연필, 미끈거리는 크레용 중 무엇인지는 특정할 수 없다. 어떤 터치는 바짝 깎지 않은 뭉툭한 연필형 색연필인 듯도 싶고, 언뜻언뜻 색이 굵게 뭉쳐진 걸 보면 돌돌이나 크레용으로 볼 여지도 있다. 심을 뾰족하게 깎아서 채색하지 않은 이유는 색연필 특유의 푸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라고 짐작해본다.


윤곽을 돋보이게 그리면서도 화사한 색감을 사용한 점에서 고갱이나 마티스, 또는 페긴 베일 구겐하임 등의 작가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Sopia는 답습이 아닌 재창조의 길을 걸었다. 특히 색연필이라는 채색 화구의 차이로 말미암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척한 것이 두드러지는데, 완벽히 건조되는 데 100년 이상이 걸리는 유화 대신 색연필을 사용함으로써 속도감 있게 작품을 완성하였다(독서에 필요한 책갈피를 속도를 내어 완성해야 한 보면, Sopia에게 독서는 시급한 것, 계속 이어져야만 하는 일상이었나 보다).  

유화와 색연필. 재료의 차이로 인해 작품에 구현되는 텍스처의 차이, 그로 인한 시각적 효과의 갭 또한 역력하다. 인상주의, 야수파, 표현주의도 아닌 'Sopia 주의'의 탄생이다. 또한 매끄러운 유화가 아닌 포슬포슬한 색연필의 질감은 사인펜으로 그린 테두리와 잎의 뾰족한 톱니 형태가 주는 딱딱함을 완화시키는 효과도 있다.


한편, 유화는 수정이 자유로운 반면 색연필은 수정이 어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재료인 크레파스나 색연필이 사실은 꽤나 까다로운 재료라는 걸 잘 모르는 어른도 적지 않다. 

한 번 종이에 그어진 색연필의 흔적은 기름, 물, 지우개 그 어느 것으로도 깨끗이 제거하기란 매우 어렵다. 덧칠 역시 용이하지 않다. 조금만 서투르면 곱게 색이 쌓이지 않고 얼룩덜룩 뭉쳐버린다. 

같은 맥락에서 조색 역시 어렵다. 물감 같은 것에 비해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유별나게 다양한 색으로 일일이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작가 쪽에서의 인위적인 조색이 어렵다는 반증이다. 물감 세트는 많아도 36색이다. 그중 내가 원하는 색이 없으면 팔레트에서 섞어 만들면 그만이다.  색연필은 그게 안 되기에 120색, 180색까지도 세트로 묶어 판매한다.  

재료 자체의 핸디캡도 많고 일필휘지에 가깝게 결판을 내야 하는 색연필 작업을 선택한 걸 보면 Sopia는 숙련된 작가이거나 과감한 아마추어, 양쪽 하나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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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마무리를 향해 간다. 가위질이다. 그림을 완성한 후 나뭇잎 모양대로 잘라냈다. Sopia는 여기서 커팅의 비대칭을 통해 나뭇잎이 가진 '자연'이라는 특질을 배가시킨다. 오른쪽은 최대한 선에 맞춰 잘랐지만, 왼쪽은 선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과감하게 자르거나 반대로 선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을 잘라 답답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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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질에 서툴렀다거나 귀찮아서 대충 자른 게 아니냐는 의혹은 나뭇잎의 잎자루에서 묵살된다. 도화지에 인쇄된, 가위로 잘라서 가지고 노는 '종이 인형'을 떠올려보자. 종이 인형을 자를 때 최대 난이도는 인형 몸체와 인형 옷을 합체시키기 위해 디자인된 짧고 얇은 흰색 '고리'부분이다. '고리' 부분을 자르다 조금만 삐끗하면 종이 인형의 화려한 드레스 한 벌이 날아가게 된다. 이 나뭇잎 책갈피에서는 종이 인형의 '고리'보다 더 얇은 잎자루가 달려 있다. Sopia는 고도의 가위질로서 잎자루를 날려먹지 않고 정교하게 살려냈다.


마지막으로, 완성한 그림을 코팅한 후 사방 5mm 정도의 여유를 주어 잘랐다. 접착면이 있는 코팅지를 두 장 맞붙인 것이 아닌 열 코팅을 했다. 코팅지의 견고한 빳빳함이 그것을 말해준다. 튼튼하게 코팅한 이유는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Sopia는 자신의 작품과 독서를 사랑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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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팅지를 자른 모양에서 거의 확신에 가깝게 알 수 있는 건, 이 책갈피가 유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색연필이라는 친근한 재료와 얼핏 자유분방해 보이는 가위질을 보고서 혹시 어린이의 작품이나 노리개가 아니었을까라는 고민을 일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잎자루 부분을 둘러싼 코팅지의 저 각진 모양은 이것이 오직 어른용 책갈피라는 걸 증명한다.


부모들은 유아인 자녀가 코팅된 무언가를 사용할 땐, 반드시 그것이 가진 일체의 각을 둥글게 잘라 준다. 보통의 부모는 Sopia의 책갈피와 같은 90도의 각이 진 코팅 물체를 절대 아이에게 주지 않는다. 칼 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을 Sopia가 코팅해서 책갈피로 사용하는 확률 역시 당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미적 감수성은... 아아... 이 가정까지 탐구하는 건 글의 흐름에서 벗어나니 논외로 하겠다.


코팅지의 겉엔 잦은 마찰로 인한 미세한 잔 흠집들이 촘촘하다. 자주 사용했다는 뜻이며 책을 즐겨 읽었다는 명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갈피는 책의 뒤표지 바로 앞에 꽂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무심코 맨 끝장에 꽂아두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진귀한 책갈피는 얼마나 많은 책들로 인해 자신의 아름다움이 가리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아왔으며, 얼마나 많은 기간 동안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주며 종이의 무게를 견뎌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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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를 뒤집어 보면 그의 이름 Sopia Lee가 연필로 적혀 있다. 솔직히 처음엔 Sophia를 잘못 쓴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구글링 해보니 Sopi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심지어 Sopia라는 성을 가진 사람도, 또 Sofi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까지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몰랐던 이름을 알아가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페이스북 검색을 해보니 한참을 드래그해서 확인한 모든 Sopia들은 여성이었다. 그중 Sopia Lee는 아쉽게도 없었지만, 책갈피의 주인을 조심스럽게 여성이라고 연역하여본다.


이 책갈피는 『출근길의 주문』이라는 책에 꽂혀 있었다. 직장인 여성을 독자로 설정하고 쓴 책이다. 일하는 여성에게 필요한 말과 글, 사람들과의 연결, 차별이나 어려움을 대처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 Sopia도 나처럼 직장인이 아니면서 그냥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이 책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꼭 여성만 보라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확률상, 이 책을 고른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한 어떤 고민을 가진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책갈피와 Sopia에 대한 헤아림을 마치자, 경이로운 책갈피의 주인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행여 도서관 홈페이지에 '책갈피를 찾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온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도서관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도서대출 방법 건의', '도서관  이용 제한이 코로나 예방에 효과 있나요?', '예약 도서 수령 날짜 문의' 등의 제목이 대부분이다. 그때 눈에 꽂히는 제목 하나.


'우산도둑'


제목들 중 짧은 축에 드는 이 네 글자가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비밀글이라 내용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안 봐도 비디오였다. 후텁지근한 역대급 장마 기간에도 불구, 마스크 끼고 빗속을 뚫고 도서관에 도착, 미리 예약한 영혼의 양식을 수령, 흡족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려는데 도서관 입구 우산꽂이에 내 우산 어디 갔어? 책장에서 건져 올린 책을 빗속에 빠트리지 않고 집까지 보송하게 어찌 데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난감함과 어이없음에서 우러난 타는 분노가, '도둑'이라는 단어와 띄어쓰기도 생략한 키보드 위의 질주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책갈피도둑'이라는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이 책을 빌린 지 이미 수 일이 지났는데도. 


아아 Sopia... 당신은 이 빛나는 나뭇잎의 창조자로서 이것과의 떨어짐이 견딜 수 없는 쓰라림 일지언정, 다른 독자의 손에서 반겨지기만 한다면 그 역시 기쁜 일 아니겠는가, 라며 '도둑'이라는 단어가 섞인 겁나는 제목 따위는 무의식에서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Ⅲ 연구 결과 및 결론


식물을 싫어하지는 않는 사람, 초록색을 싫어하지는 않는 사람, 여자 어른일 가능성이 많은 사람, 서툴렀을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림을 그린 사람, 색연필을 손에 쥐었던 사람, 책을 자주 읽는 사람, 일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도 있는 사람. 이것이 내가 신뢰 수준 99%, 오차 범위 ±2.3%로 조사한 Sopia이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 초록색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 여자 어른, 서툴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 태블릿 펜을 손에 쥔 사람, 책을 좋아하는 사람, 일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 이 사람은, 나다. 


Sopia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저런 공통분모는 책갈피를 보자마자 눈 속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그 정보들은 순식간에 복잡한 감정을 팽창시켰다. 순간 "어... 어..." 하는 소리 말곤 할 말이 없었다. 『자존감 수업』에서 윤홍균은 이렇게 썼다. "어떤 감정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그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본능의 영역에 있는 사람에게 이성의 영역에 있는 답을 요구하니 당연히 설명을 못할밖에." 


범람한 정보와 감정들은 수십 분의 시간이 흐르면서 차근차근 정렬되었다. 그것들은 반가움, 위로, 연대 그리고 별나게도 그리움이라는 꽃이 되어 정원을 이루었다. 갑자기 다가온 엉뚱한 향기들을 붙잡아두고 싶어서 글이라는 꽃병에 어설피 담아 보았다.


나는 교집합이 많은 사람을 책갈피를 매개로 조우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냥 이 책갈피에 나를 투영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 사건의 중매자가 된 책 『출근길의 주문』에 자주 등장하는 "자매들이여"라는 부름에 Sopia와 내가 비슷한 시간대에 대답이라도 한 것일까. 답은 모르겠다. 그저 내 맘대로 반가운 사람이라고 정해버린 Sopia, 지금도 어디선가 고민하며 살아갈 것 같은 오타가 아닌 그 이름을 존중하고 싶다.

"옆자리 여자를, 윗자리와 아랫자리 여자를, 옆집 여자를, 당신을 위해 일하는 여자를, 모르는 여자를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존중하자." 이 문장이 적힌 168 페이지에 내가 모르는 사람 Sopia의 책갈피를 꾸욱 꽂아 놓았다. 그곳을 쫙 펼쳐서 아래로 뒤집은 후 힘껏 흔들어보아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꾸욱.  


Sopia님, 그대의 보물을 다시 책에 끼워 보냅니다. 책갈피가 모쪼록, 당신의 손에 무사히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부분을 담고 있는 이 물체와의 즐거운 만남을 선물해 준 것에 대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진 이 땅에서 아름다운 수수께끼 같은 비대면의 인사를 건넨 당신께, 저도 당신의 것을 돌려보냄으로써 고마움과 미소를 표하는 바입니다. 한편, 당신은 사실 책갈피 속에 당신을 암시하는 단 하나의 점도 찍어놓지 않았음에도, 제가 무례하게 맘대로 판단을 해 댄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쪼록 이 큰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는 고백.

이 모든 사건은 자작극이 아니며, 내 이름은 Sopia Lee도 당연히 아님을 엄숙하게 시인한다.


아 물론 신뢰 수준이랑 오차 범위 이야기는 뻥이었다. 수알못인 나는 그게 뭔 소린지 통 모른다.

그리고 난 논문을 써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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