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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Oct 20. 2020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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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은 생각보다 급하게 왜곡된다. 10명 중 한 명만이 2년 반 전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할 뿐이다. 울릭 나이서는 기억의 재구성에 대해 연구한 사회심리학자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라도 2년 반이 흐르면 그 일을 바르게 기억할 가능성이 10%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인간은 한창 인공지능 같은 굉장한 걸 만들어내고 있지 않나. 그렇게나 똑똑한 인간의 기억 능력이 이다지도 멍청하다는 게 슬프다. 


2년 반도 저런 실정이니 35년도 넘는 과거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는 건 무리일 거다. 그날은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 순간 뇌 속 시냅스의 세기가 평소보다 강해지면서 기억 한 장이 남았다. 약간의 아웃포커싱과 노출과다로 테두리가 뭉그러지고 색이 동동 뜬 사진이지만 자주 꺼내보는 이미지이다. 시간이 흐르며 그날의 화질이 점점 옅어지는 게 야속하다. 하루라도 더 빨리, 바랜 이미지를 글로 일으켜 세워 본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 단어는 희한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살'이라고 읽어야 하는 걸까 '삼'이라고 읽어야 하는 걸까, 어린 나는 궁금했다. 아빠와 바닥에 배를 깔고 나란히 누워서 『꽃들에게 희망을』 책을 읽고 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았던 것 같다. 창틀, 문틀, 가구의 일부분이 밝은 햇빛에 지워지고 있었다. 우주 먼 곳에서부터 달려온 빛은 딱 알맞은 시간에 조금 넉넉한 양으로 두 사람이 놓인 방을 하얗게 밝혀 주었다. 덕분에 책의 글과 그림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빠는 예기치 못한 내 질문에 난감한 듯 잠깐 웃으셨다. 나도 모르는 새 '삶이란 뭔가요?'라는 묵직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아빠께 던진 참이었다. 아빠는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어떤 설명이었는지 단 한마디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애써 설명해 주시던 윤기나는 목소리와 편안한 표정이 기억난다. 질문을 하긴 했으나 '삶'이 뭐가 됐든 하나도 문제 될 게 없는 순간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봐도 되는 자유. 내 말을 웃으며 들어주는 사람. 나에게 시간을 내어 주는 사람. 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목소리. 이 모든 게 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 안을 환하게 메운 빛을 닮은 눈부신 사랑이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아빠와의 책 읽기는 저 장면이 유일무이하다. 아빠는 아주 바쁜 분이셨다. 출장을 밥 먹듯이 다니셨다. 먼 나라에서 온 아빠의 엽서를 자주 받았다. 거기엔 나와 오빠의 얼굴이 그려져 있거나, 우리에게 인사를 하는 아빠의 흔들리는 손이 그려져 있었다. 앨범에 그 엽서를 끼워놓고 자주 들여다보았는데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위안을 받았다. 아빠를 마중하러 기차역과 공항에 나간 날도 참 많았다. 우르르 밀려 나오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 아빠는 어디 계실까, 열심히 찾았다. 기억력 짱일 것 같은 AI는, 건포도 세 개 박힌 머핀과 치와와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한다고 한다. 멍청한 나는 수많은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중에서 족집게처럼 아빠를 잘도 찾아냈다(AI야, 부단히 연마하렴). 오랜만에 만난 아빠의 손을 잡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행복했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 식사를 하시는 아빠를 옆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면 아빠는 하얀 밥에 국물을 적셔서 한 입 나누어 주셨다. 따뜻한 맛이었다. 아빠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재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와 양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음에도. 


우리 집엔 그림책이 거의 없었다. 『꽃들에게 희망을』 책도 사실 어린이 그림책이라고 보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엄마는 그림책을 사주고 싶어 하셨는데 아빠는 반대하셨다고 한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초등학생 때 백과사전을 가진 친구가 부러웠던 적이 있다.  뭘 조르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백과사전 이야기는 부모님께 슬며시 꺼내봤다. 나의 어른들은, 장차 종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인터넷 사전인 위키피디아를 140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것을 내다보실 만큼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다. 백과사전은 사주지 않으셨다. 

내가 볼 만한 책은 거의 없었지만 어른이 보는 책은 책장에 빼곡했다. 책등에 적힌 제목을 읽으며 답 없는 추리를 하며 놀았다. 아이아코카 자서전. 아이아코카는 코코아랑 비슷한 건가? 자서전은 무슨 말이지? 엄마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즐겨 읽으셨다. 무표정이던 엄마가 그 책을 보실 때 가끔 웃으셨다. 그 속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아리송했다.


아빠가 그림책 비슷한 걸 읽어주신 건 여러모로 즐거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바쁜 아빠'가 '막연한 동경이었던 책'을 읽어주시다니. 금이나 다이아몬드만큼 희귀한 날. 조르지도 않았고 원하는지도 몰랐지만 알고 보니 가지고 싶었던 날. 반짝이는 값진 날이었다. 짧지 않은 책을 끝까지 읽어주신 아빠의 따뜻함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고 마음에 남았다. 인생의 추위가 닥쳤을 때 쬘 수 있는 난로 같은 것이었다. 책이 '되게 되게 좋은 것'이라고 인식된 첫날이기도 했다. 


며칠 전 『꽃들에게 희망을』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보았다. 옛날에 내가 봤던 건 표지가 얇았는데 도서관 것은 하드커버였다. 그것 빼곤 앞 · 뒤표지와 내용이 모두 동일해서 반갑고 고마웠다.

다시 읽어보니 신기할 만큼 모든 내용과 그림이 기억났다. 맞아, 맞아. 이런 그림, 이런 내용이었지. 그러면서도 모든 게 너무나 새로웠다. 이런 내용이었어? 다 아는데 다 모르고 있었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의 대화가 풍요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글자들에게서 낯선 자장이 발생하여 내 마음과 문장들 사이에 감응이 일었다. 


'삶'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빨리 등장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됐다. 1장에서 겨우 두 장을 넘겼을 때 '삶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던 거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문장 속에 내 질문이 적혀 있을 줄이야. 삶의 페이지를 채 몇 장 넘기지 않았던 어린 내가 했던 질문. 그로부터 35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저 질문을 들고 여기저기 탐문 중이다.


결정적 순간 속에 인화되어 있는 그 책은 나에게 말했다. 생각도 없이 남을 밟으며 올라가는 것은 삶이 아니라고. 서로 사랑하는 것,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발견해 나가는 것이 삶이라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 순간을 AI처럼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게 애석하다. 나와 아빠는 몇 살이었을까. 몇 시쯤이었을까. 무슨 계절이었고 무슨 요일이었을까. 그날에 관한 쓰잘데기없는 모든 세부정보를 다 알고 싶다. 그날 우리 집을 훑고 다시 우주로 빠져나간 빛을 관측해봐야겠다. 어떤 물체가 빛을 뿜어낼 때 그 빛을 파장으로 나누어 스펙트럼을 수집한다. 모든 원소는 각각 특징적인 스펙트럼을 갖는다.  수집된 스펙트럼을 분광기로 분석하면 그 물체의 원소 구성을 얻어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먼 우주에서 오는 별빛만으로도 그 별이 어떤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지 꽤 분명하게 밝혀낸다. 오늘부터 달리기 연습을 해서 제법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 그날의 빛을 따라잡아야겠다. 아니면 우주라는 암실에서 또렷하게 현상되고 있을 그 빛 조각을, 똑똑한 AI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할까 보다. 흘러간 빛을 찾아 현미경으로 살핀 후 그날의 시시콜콜한 신원을 마침내 확인한 기쁨을 실험 보고서에 경쾌하게 써 내려가야지.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멍청함이 슬퍼서 스마트폰 같은 걸 기어이 만들어낸 건지도 모른다. 불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손쉽게 박제하려는 갈망이 사진기를, 스마트폰을, 각종 sns를 호황 시켰을 거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절묘한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한 걸로 유명하다. 결정적 순간을 사진에 담기 위해 12시간 넘게 기다린 적도 있단다. 그러나 난 그의 위대한 사진들에 감동받아 본 적이 없다. 내 멍청함은 위대한 사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작동되나 보다. 난 어쩐지 브레송의 사진보다는 그의 말이 더 좋았다.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


둘째 아이가 책을 읽다가 나를 불렀다. "엄마 이게 무슨 말이에요?" 작은 손가락으로 짚은 단어는 '삶'이었다. 마음이 쿵- 울렸다. 허둥지둥 그 어려운 단어를 설명해 주었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내가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해 줬는지 단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는다. 설명하는 줄곧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것, 아이가 내 설명을 들은 후 미소 지은 것, 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 그 책이 만화책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최근의 결정적 순간조차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멍청한 나이지만 뭐 그냥 괜찮다. 내 마음속엔 꺼지지 않는 난로가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비슷한 걸 나눠주려고 허둥대며 산다. 내 삶의 날들은 나비만큼 아름답고 꽃처럼 피어나는 결정적 순간을 향해 굼실굼실 기어간다. 오늘도 빛은 내 하루를 밝혀 깨웠다. 시냅스에 끙 차-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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