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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Nov 11. 2020

빈둥거리는 여행에 합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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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밖에선 바짝 마른 낙엽이 차가운 가을밤 바람에 떠밀려 아스팔트 바닥을 통통 굴렀다. 노란 나뭇잎들은 건조하고 급한 바람결에 촤르르 소리를 냈다. 여행하며 나온 빨랫감은 세탁기를 다섯 번 돌려서야 동이 났다. 빨래 너는 축축한 손이 바람 탓에 시렸다. 젖은 옷들도 건조대에 걸려 덜덜 떨고 있다. 어둑해질 때까지 손 시리게 일했음에도 통통 촤르르 소리에 기분이 좋았다. 엎드린 도로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낙엽의 바스락 소리가 청량하다. 빨래 더미들이 사라진 자리도 그러하다. 몇 시간 전까지 쌓여 있던 더러운 옷 더미는 빚더미처럼 보기 싫었다. 이제 나는 빚이 없다. 노동의 짐을 덜어낸 나는 까맣고 을씨년스러운 밤을 너그러이 쳐다봤다. 마음이 가을 보름달처럼 밝아졌다.


나와 남편으로서는 쉽게 추진하지 못했을 과감한 여행을 다녀왔다. 길이와 코스, 시기, 경비 모두에서 그랬다. 13명이 2대의 차로 4일 동안 움직였다. 풍경 사진 138장을 찍었고 가족 친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168장을 건졌다. 7군데의 관광 명소를 방문했다. 매 끼니마다 맛집과 유명 카페를 찾았다. 3종류의 보드게임을 했다. 4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기 위해 우리들은 몇 시간씩 도로를 달렸다. 아이들은 어디에 언제 도착하냐며 울다 잠들었다. 어른들도 차에서 졸았다. 운전자도 가끔 졸았다. 방지턱을 넘을 때 뒷좌석에 앉은 나는 차 천정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셋째 날, 둘째 아이는 그날 가장 재밌었던 일로 차에서 했던 스무 고개 게임을 꼽았다. 여행 내내 차를 몰거나 탄 남편은 집에 돌아와 파김치가 됐다.


바쁜 일상을 살던 13명이 똑같은 날짜를 비워 4일간 여행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시간은 금쪽같은 걸 넘어 다이아몬드쪽 같은 것이었다. 1초도 허투루 날려버릴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여행 기획자는 최선을 다해 비용, 시간, 만족도의 모든 면에서 경제적이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 최선이 나의 취향과 완전히 겹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느낀 나의 기쁨이 거짓이라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한편 좋기도 했고 한편 내 취향과 다르기도 했을 뿐.


여행은 일상을 멈추고 낯선 곳으로 옮겨 나를 환기시키는 일이며, 할 일 없는 장소에서 편히 쉼으로써 일상을 다시 살아낼 힘을 얻는 충전이다. 내가 추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왕 가게 된 것이니 여행의 그런 순기능을 희미하게 기대했다. 생존하느라 분투하는 수고를 잠시 정지하고 맛보는 평화로운 무언가를.


내가 정지했다고 세상까지 나를 따라 멈추진 않았다. 비현실적인 숙소의 평면 텔레비전은 울룩불룩한 현실 소식을 전했다. 희극인 박지선과 그의 어머니가 숨졌고, 트럼프는 같은 당 사람들도 외면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었고, 미국 대선의 팽팽한 개표 소식이 들렸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수감되었다. 한숨 없이 볼 수 없는 현실은, 여전했다.


내 일상도 나와 상관없이 착착 흘러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냉장고 구석에 뒀던 숙주나물이 완전히 썩어 있었다. 곰팡이 죽탕이 되어 진물을 질질 흘렸다. 채소 칸을 다 드러내어 서랍을 씻고 냉장고 청소를 했다. 최소한의 짐을 챙겨갔음에도 캐리어엔 더러운 옷이 가득 찼다. 아이들 학교에 내야 하는 가정 체험 학습 보고서를 위해 사진을 골라주고 보고서 작성을 도와줬다. 여행 중 수령 기간이 끝난 아이의 예약 도서를 도서관에 재신청했다. 여행 가서 읽으려던 내 책도 몇 장 읽지 못했다. 집에 뒀던 대출도서 다섯 권의 아까운 대출 기간도 4일을 생으로 까먹었다.


다음 여행은 당일치기나 1박 2일이 좋겠다. 그러면 헛웃음 나올 만큼의 빨래도 안 나오겠지. 여행 때문에 일상이 빚더미처럼 쌓이는 건 불편하다. 여행 후의 야근이 불 보듯 뻔한데 어떻게 편한 마음으로 여러 날 놀 수 있을까. 여러 사람들보단 남편과 오붓하게 떠나는 편이 좋겠다. 거기서 소로우처럼 부유하게 시간을 쓰고 싶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말했다. "그 당시 나는 정말로 부유했다. 금전상으로가 아니라 양지바른 시간과 여름의 날들을 풍부하게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아끼지 않고 썼다." 한 번 여행에 자연 한 컷을 아낌없이 음미해보고 싶다. 남이 해 주는 음식은 좋지만 육식 위주의 맛집은 싫다. 코로나가 아직 안 끝난 만큼 여행 가더라도 사람 없는 곳을 조심스레 방문하고 싶다. 차를 많이 타고 다니며 이것저것을 열심히 보느라 바쁜 여행은 피곤하다. 일상도 바쁜데 여행마저 바쁜 건 별로다.


여행 취향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저런 여행을 당장 가야겠기에 하는 소리가 아니다.  '만약 간다면 저런 여행이 좋겠다'라는 입장 정리일 뿐이다. 집순이라서 원래 여행은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집순이에게도 쉼표가 절실할 때가 있는 법. 일상에서 손쉽게 찍지 못하는 쉼표를 다음 여행에서만큼은 남용하고 싶다. 이렇게. ,,,,,,,,,,,,,,,,,,,,,,,,,,


뻥이다. 쉼표 키를 꾸우욱 눌렀더니 27개가 찍혔을 뿐이다. 저게 다 필요하진 않다. 난 10년 차 미니멀리스트라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소박하게 사는 걸 지향한다. 쉼표는 숨 한번 여유롭게 들이마시고 뱉을 만큼이면 족하다. 일상에서 잠시 짬을 내 공원 산책을 하는 것도 내겐 여행 못지않다. 이 얼마나 가성비 좋은 사람인가. 그러나 모두 나 같지는 않으니 그 대표적 인물은 바로 우리 집 둘째. 이번 여행에서 둘째는 집에서 잘 보여주지 않던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일상에선 하루 864000초 한 가닥 한 가닥을 섬세하게 심심해하던 아이다. 이 정도는 놀아야 심심병이 호전되는 거구나. 아이의 얼굴을 보며 우리 부부는 '부르주아의 미소'라며 소곤댔다. 둘째는 마지막 날 통곡했다. 친척과의 재밌는 시간, 화려한 음식, 눈 떠서 감을 때까지 놀기만 하는 하루, 기념품(장난감) 득템, 말쑥한 호텔 숙소와의 이별이 절망적이었겠지.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처음 읽었을 때 이게 축원인지 얄미운 소리인지 헷갈렸다. 나 같은 서민에겐 먼 나라 이야기 같아서이다. 저 문장에서 '돈'을 '시간'이라는 단어로 수정해서 읽으니 거부감이 덜하다. 부르주아인 둘째는 '책'이라는 단어를 '기념품'으로 수정할지도 모르겠다. 여행과 빈둥거림을 직선상에 놓는다는 점에선 버지니아 울프와 나, 둘째 아이 모두 평화롭게 합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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