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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Nov 21. 2020

선풍기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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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가을을 상징할만한 물건이 없다. 선풍기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점프한다. 고백하자면 올해 선풍기 치운 날짜는 11월 13일이다. 겨울이 코앞에 올 때까지 선풍기를 방치해두었다. 이게 다 큰애가 더위를 많이 타서 일리가 없고 그냥 나의 위대한 게으름 탓이다.


4~5개월 동안 집안 곳곳에 서 있던 선풍기들. 그것들의 몸체는 가끔 닦아주었다. 그러나 선풍기 날개는 1년에 한 번만 닦는다. 덕분에 거기엔 수개월 동안 수집된 먼지가 기모로 된 옷처럼 덮인다. 버튼을 눌러 날개가 돌아가면서 시원한 바람이 먼지와 함께 내 얼굴에 닿는다. 아! 상쾌해!


재밌는 집안일 베스트를 꼽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안일'이라는 주어에 '재미있다'라는 서술어가 호응될  없다는 설명은 18세기 문헌인 『가사고록家事苦錄』 에도 나와 있다(팩트 체크 금지). 집안일을 재미있다고 말하는 자는 7 이하의 징역 또는 9천만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오늘날의 헌법도 있지 않은가(팩트 체크 금지2). 나는 교양 있고 건전한 국민이므로 재미없는 집안일을 무표정으로 실행한다. 집안일을 혐오하진 않는다. 나는, 나와 가족의 생존을 위한 무기(無期) 의무에 충실하게 복역한다. 「쇼생크 탈출」을 일주일에  번씩 보면서.


집안일 워스트를 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풍기 닦아서 치우는 건 집안일 워스트 부분 5위 안에 든다. 아, 이건 비밀인데 나는 물개로 변신할 수 있다. 다이슨 선풍기를 보기만 하면 된다. 주부의 고충을 소름 끼칠 만큼 꿰뚫어 본 그 물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2박 3일 동안 물개 박수를 했다. 비록 나는 사지 않았지만, 저 쇠창살도 없고 날개도 없는, 도넛처럼 뻥 뚫린 선풍기를 50만 원이나 주고 사는 사람들을 나는 500,000% 이해한다. 선풍기의 창살 달린 덮개와 날개에 붙은 야무진 먼지들은 최악이다. 그것은 범죄이며 수치이며 해악이며 폐단이며 사회악이다. 선풍기는, 청소하기 귀찮게 생겨먹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집단지성이 올인하여 빚어낸 수작(酬酌)이며, 획기적 수선이 필요한 단 하나의 가전이다. 물론 다이슨 선풍기, 인정한다. 그러나 다이슨은 가격을 수선해야 한다.


널찍한 가구 위에만 먼지가 앉는다면 청소하는 입장에선 참 고마울 것 같다. 그러나 먼지는 꼬장꼬장한 평등주의자다. 선풍기 앞 덮개와 뒤 덮개의 촘촘한 쇠 살 한 줄 한 줄에까지 차별 없이 착석한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안 끼는지는 몰라도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엔 먼지가 잘만 붙는다. 시도 때도 없이 쌩쌩 회전하는 매끈한 플라스틱 날개에 당최 어떻게 먼지가 붙는 건지. 기술 참 대단하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을 피부로 느껴보기 위해 중국 태산까지 갈 필요는 없겠다. 내 옆의 선풍기를 비롯하여 모니터, 책상, 냉장고의 윗부분과 청소기 먼지통 안을 쳐다보면 되니까. 먼지는 내 곁에서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일관되게 쌓여간다. 내가 먼지처럼 살았다면 하버드에 갔을 텐데.


먼지의 위력을 피부로 느끼는 것은, 피부가 과거의 자신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빌 브라이슨은 『바디』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피부를 떨군다. 1분에 약 2만 5,000개, 즉 1시간에 100만 개가 넘는 피부 조각이 떨어져 나간다… 소리 없이 그리고 냉혹하게 우리는 먼지로 변해간다." 우리 집에는 이런 인간이 넷이나 된다. 주부인 나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나도 조금씩 먼지로 변환되는 중이다. 나는 아주 작은 조각이 되어 선풍기 날개의 얇은 폭에 앉는다. 가구 아래 깊숙이 들어가 숨바꼭질도 한다. 방충망의 쪼끄만 네모 구멍을 통과할 만큼 날씬하기도 하다. 산책하다가 흙길 위에 떨어진 나는 풀꽃의 영양분이 된다. 오늘 흘린 2400만 개의 '내'가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너른 강에서 추위도 못 느낀 채 신나게 수영을 하거나 별이 뜬 밤하늘을 추락 걱정 없이 훨훨 날아다니면 좋겠다. 커다란 덩어리인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 육체가 몇 개의 먼지로 세상에 남게 될지 궁금하다. 제발 적어도 내 후손들의 선풍기, 그곳에만큼은 앉아 있지 말기를. 후손들의 짜증 섞인 거친 걸레질에 내가 탈탈 털리는 굴욕은 맛보고 싶지 않다(덜덜).


11월 13일. 선풍기 덮개를 연결하는 나사를 풀었다. 선풍기는 분해부터 귀찮다. 나사라니, 나사라니! 5살 넘은 선풍기의 나사는 녹슬어서 잘 돌아가지도 않는다. 나사와 덮개 사이에 작은 쇠붙이가 끼여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쇠붙이의 용도와 명칭은 모르겠다. 그게 없으면 덮개를 원상태로 붙여놓을 수 없다는 건 안다. 나사와 쇠붙이같이 잃어버리기 쉬운 부품 따위가 없는, 똑- 딱- 두 단계로 개폐가 가능한 선풍기 덮개를 원한다. 손쉽게 분리할 수 있는 덮개 제작은 정녕 불가능한 일입니까!라고 선풍기 회사의 고객 센터에 전화!하고 싶지만 실행해 옮기지는 않았다. 선풍기 4대의 덮개와 날개를 늘어놓으니 좁은 거실이 꽉 찼다. 브러시 노즐로 바꿔 끼운 진공청소기의 주둥이를 가느다란 쇠 살과 선풍기 날개에 문질렀다. 큰 먼지를 대충 제거한 후 걸레를 가져왔다. 빽빽한 쇠 살, 날개들, 미풍과 약풍 버튼의 사이사이, 기일쭉한 전선까지 싹싹 닦았다. 핑크색 극세사 걸레의 채도가 변했다. 해체한 선풍기를 조립하는 것부터는 남편이 맡았다. 때를 뺀 선풍기는 새 부직포 커버를 입었다. 선풍기는 이제부터 여름까지 이어지는 긴 겨울잠을 잘 것이다. 우리 집엔 문 달린 창고가 없다. 꼭 필요하지만 잠깐씩 사용하는 선풍기 같은 물건들은 베란다 구석으로 보낸다. 선풍기는 그곳에서 2열 종대로 서서, 먼지가 새 옷에 벌써 적금되는지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선풍기를 집어넣고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냈다. 아이들이 팔짝팔짝 뛰며 트리 장식을 도맡았다. 크리스마스는 아직이지만 기분이 좋아서 트리 전구를 밝혔다. 먼지 대신 반짝임이 찾아왔다. 세상 사람들아아~! 우리 집 드디어 선풍기 치웠다아아~!


자축의 의미로 떡볶이를 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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