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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Nov 25. 2020

쓰레기통이 되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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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하얀 물건을 구경했다. 금덩어리를 넣어놔도 괜찮을 디자인이었다. 참 잘 만들었다. 상품 이미지 옆에 '74,900원'이라는 글씨가 굵고 빨갛게 안내되어 있었다. 사람이 다가가면 자동으로 뚜껑이 열린단다. 샤오미에서 쓰레기통도 만드는구나. 요즘은 쓰레기통도 예쁘고 똑똑하고 고급스러워야 팔리나 보다. 암만 근사하다고 한들, 나는 쓰레기통이 되긴 싫다.


현관문이 열리며 큰애가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왔다. 아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엄~마아~"라고 입을 뗐다. 학원에서 새로운 곡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어렵단다. 연습해도 잘되지 않아서 답답했고,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선생님 때문에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수업 시간을 넘겨서까지 연습을 했노라며 억울한 일 당한 사람처럼 사연을 털어놓았다. 고생한 이야기를 마친 큰애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지, 다음 주에 다시 쳐보면 될 거야.


아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10분 동안 울었다. 20분이 넘었지만 계속 울었다. 비련의 주인공처럼 목구멍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내리 30분을 울었다. 나는 아이 방과 마주한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고 있었는데 점점 한계를 느꼈다. 저 소리를 조금만 더 들어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녁 짓다 말고 집을 뛰쳐나갈 수는 없는 처지였다.


아이에게 이제 그만 울라고 말했다. 큰애는 잠깐 움찔하더니 더 서럽게 울었다. 40분째 울길래 한 번 더 말했다. "그만 좀 울어."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오래 울어야 할까. 울음을 그칠 때까지 달래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건 큰애의 완전한 자유의사였다. 나는 어릴 때 피아노를 억지로 배웠다. 손등을 맞으면서도 찍 소리 못하고 배워야 했다. 어릴 땐 폭력을 참아야 했는데 이젠 저 울음소리를 참아야 하는 건가. 나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거지. "그만 좀 울어"에서 '좀'이라는 단어는 군더더기였나. 말투가 너무 퉁명스러웠던 걸까.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랬나. 영혼이 나간 상태로 칼질을 했다. 내가 무슨 요리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큰애는 눈물샘에 연결된 수백 톤짜리 물탱크를 지고 태어난 것 같았다. 갓난아기 때부터 우는 걸로는 꿀리지 않았다. 눈물 부족 국가에 태어났다면 톡톡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초등 고학년이 된 지금도 심사가 틀릴 때면 장황하고 드라마틱하게 울음을 뽑는다.


큰애가 자신의 그런 천성을 조절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 부모를 피곤하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우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긴 울음 앞에서 쉽게 초연하지 못한다. 울음소리는 공기를 타고 내 달팽이관을 따갑게 때린다. 고문에 버금가는 청취를 어쨌든 끝까지 들어야 한다. 라디오라면 1초 만에 꺼버렸을 테지만 사람에겐 전원 버튼이 없다. 아이의 감정에 동기화되지 않으려고 나는 애를 쓴다. 저 울음과 감정은 아이의 몫이다. 그러나 아이의 어두운 감정은 자꾸 내 마음을 침략한다. 의젓하고 싶은 어른은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맥없이 개조돼버린다.


아이가 40분쯤 울고 있을 때 남편이 퇴근했다. 남편은 큰애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큰애가 말했다. "피아노 학원에서 어려운 곡을 배워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울었는데 엄마가... 흑흑... 그만 울라고... 흑흑흑...  해...서.....엉엉엉엉엉~",


겨우 남아 있던 내 작은 기력은 아이의 말에 싹 휘발됐다. 내가 울지 말라고 말한 건 고작 10분 전이다. 그러나 아이의 뉘앙스 속에선 자신을 40분 동안 울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피아노 학원이 아닌 엄마인 나에게 무게가 더 쏠려 있었다.


30분 참아준 것은 너무 짧았나. 40분 참았어야 했나. 50분까지 울어도 내버려 뒀어야 했나. 아이의 눈물 용량과 나의 수용 용량의 갭이 너무 크다. 아이가 자기 울음의 탓으로 나를 꼽은 걸 듣고 서운함이 곤두섰다. 아이를 안아주고 위로해 줬던 순간은 텅 빈 표정으로 민망하게 서 있었다.


어릴 때 엄마에게 뺨을 맞은 날이 생각났다.


아빠와 함께 친할머니 댁에 다녀온 직후였다. 친할머니 댁은 같은 아파트의 3층인가 4층이었고 우리 집은 8층이었다. 아빠가 할머니 뵈러 간다고 해서 나도 따라나섰다. 집은 너무 심심한 곳이었고 할머니는 나를  반겨주셨으니   이유가 없었다. 그날도 할머니는 나에게 웃어주셨다. 우리들은 할머니  거실에서 tv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20~30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신을 벗었고, 엄마가 다가왔고, 나는 뺨을 맞았다. 엄마는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머리채를 힘껏 잡아당기셨다. 모양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지만, 잡힌 머리채 쪽만 호일펌을 한 듯 엉망이 됐다. 데칼코마니 같던 양 갈래 머리의 대칭이 우악스럽게 깨졌다. 엄마가 나에게 소리 지른 내용의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친할머니 집에 갔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야기를 하셨던 걸로 두루뭉술하게 기억한다. 엄마의 눈은 이글거렸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맞은 것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엄마가 극도로 싫어하는 일을 내가 눈치도 없이 해버렸나 보다, 라는 깨우침이 뒤늦게 들었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신기하게도 맞은 직후부터의 기억은 한 오라기도 남아있지 않다. 그 이후 시간에다가 누가 까만 페인트를 칠해 놓은 것만 같다. 아빠와 엄마가 그 후 무슨 대화를 하셨는지, 영문 없이 맞은 나는 어떤 돌봄을 받았는지, 내가 나 스스로를 어떻게 달랬는지, 그다음 날은 어땠는지, 점 하나만큼도 생각나지 않는다.


친할머니는 내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위아래로 훑어보셨다.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그 눈과 거칠고 극성맞은 입이 결혼 후 엄마를 내내 따라다녔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불쑥불쑥 찾아와 자기 아들이 밥을 잘 얻어먹는지 확인하셨다. 조사할 게 있다며 우리 집 장롱과 냉장고 여기저기를 열어보셨다. 친할머니는 우리 아빠를 당신 남편 수준으로 사랑하셨고 아빠는 그에 부응하는 대단한 효자셨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친할머니는 아들이 아니라며 섭섭해하셨다(엄마가 이미 2년 전에 아들을 낳았음에도). 그러면서도 나를 가리켜 "쟤는 나를 많이 닮았다"라며 좋아하셨다. 친할머니는 나를 비롯한 많은 손주들에게 과자 보따리를 푸셨다. 친할머니만큼 과자를 많이 주는 분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친할머니께 선물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시댁을 코앞에 두고 살기에 다른 며느리들보다 더 자주 불려 가 일을 하셨을 뿐이다. 훗날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집에 모신 것도 첫째 며느리나 셋째 며느리가 아닌 둘째 며느리인 우리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친할머니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과도 어려운 관계를 이어갔다. 엄마는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 탓에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셨다. 숨 쉬듯 가위에 눌리셨다. 가위에 눌려 비명을 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한밤의 어두움과 버무려졌다. 어린 내게는 너무 큰 공포였다.


엄마에게 뺨을 맞은 날, 엄마의 마음이 정확히 어떠했는지 잘 모르겠다. 집에선 재미없어하고 풀 죽어 있던 애가 친할머니 집에 갔다 와서 생생해진 걸 보고 못마땅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시간이나마 집에 혼자 남겨져서 외로우셨는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딸이 자신과 함께 있기보다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배신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어두운 마음은 엄마 속에 다 담길 수 없을 만큼 커졌나 보다. 그러나 그것을 시어머니나 남편에게 분출하는 건 곤란했을 거다. 엄마에겐, 남편 대신 뺨을 맞아주고 시어머니 대신 머리채를 잡혀 줄 감정의 쓰레기통이 필요했다. 그 쓰레기통은 당신의 시어머니를 닮은 나였다.


엄마는 소리를 너무 많이 지르셨다. 소름 끼치도록 지르셨다. 온 집이 진동할 만큼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으셨다. 창문 밖으로 물건을 던지고, 집 방바닥에도 던지셨다. 심지어 집에 손님이 왔을 때도 갑자기 문을 쾅 닫고 소리를 지르신 적이 있다. 손님도 좌불안석이고 나도 뭐라 설명할 말이 없어서 부끄럽고 민망했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나는 머리가 돌 것 같아서 귀를 마구 틀어막았다. 귓구멍에 손을 집어넣을 기세로 눌러대도 그 소리는 막아지지 않았다. 엄마가 심장마비에 걸려 곧 돌아가실 거란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인간의 몸이 저토록 심하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면서도 멀쩡하게 보존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 음악을 전공했다면 약간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피아노를 배우긴 했는데 결국 그림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리 나지 않는 조용한 일에 무의식적으로 끌렸던 걸까. 찢어지는 고함소리를 들으며 제발 조용한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마음이 찢어지도록 생각했다. 엄마는 머리 색이 연해짐에 따라 성격도 조금 유해지셨다. 나는 고함 속에 갇힌 아이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리와는 진정한 화해를 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길어지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어린 시절을 향해 끌려간다. 캄캄한 감정에 물든 소리라는 점에서 엄마의 고함과 아이들의 울음은 닮았다.


마음이 캄캄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나의 온기를 떼어 마음 시린 누군가를 데워주고 싶다. 사랑엔 자발적으로 자신의 손상을 선택하겠다는 숭고한 어리석음이 포함된다. 내 터럭 하나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자세로는 사랑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나를 일순 산화시켜버리면 상대의 손을 잡아주려던 내 손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잿더미는 다른 사람의 언 마음을 녹여줄 수 없다. 위로자가 되려다 감정의 쓰레기통이 돼버리면 낭패다. 상대방의 불같은 감정에 화상을 입지 않게 내 마음도 잘 지켜야 한다.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어두운 감정에 전염되지 않는 것이 참 어렵다.


식구들 저녁을 차려준 뒤 밖에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었다. 큰애는 식탁 앞에 앉아서도 여전히 약하게 훌쩍이고 있다. 소리를 듣자 하니 끝물이었다. 조금만 더 추스르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나도 나를 추스르기 위해 저 소리로부터 나를 떨어뜨렸다. 기온이 뚝 떨어진 집 밖으로 나왔다. 뻥 뚫린 산책로엔 큰 덩어리의 찬 바람이 쌩쌩 질주 중이었다. 벤치에 앉아 마음을 식혔다.


나는 큰애를 사랑한다. 따뜻한 집 대신 추운 벤치에 앉아 있는 이유는 그 애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다. 큰애는 나를 사랑한다. 큰애가 한 시간 내내 운 건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큰애는 아이이기 때문에 가족들 품에서 소리 내어 울어도 된다. 나는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들 보는 데서 웬만하면 울지 않는다. 나는 어른이기 때문에 내 어두운 감정을 약자인 아이들 앞에서 배설하면 안 된다. 나는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의 울음을 받아줘야 한다. 나는 어른이기 때문에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닌 사랑의 주체로 살아가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평생 끌고 가야 하는 이 사랑을 내가 잘 견딜 수 있기를, 지극히 보잘것없는 내 마음보를 넓혀 주시기를, 자신을 다 태워 나를 사랑한 예수님께 빌었다.


추운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았다. 벤치 맞은편에 흰색, 레몬색, 오렌지색 불빛만 멀리 서 있었다. 동그랬던 불빛이 자꾸 일그러졌다. 눈이 시려서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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