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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Nov 27. 2020

내가 면 생리대를 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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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출산을 한 달 반 앞둔 날이었다. 만삭의 나는 씩씩거리며 욕조에 담긴 빨래를 밟았다. 크게 부푼 배 때문에 발이 안 보였다. 세제의 미끈거림만 발끝에서 느껴졌다. 


잘 돌아가던 세탁기가 멈춰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탁기와 연결된 수도에 문제가 생겼는데 집주인에게 전화하니 내일 고쳐주겠단다. 다행히 화장실에선 물을 쓸 수 있었다. 빨다 만 옷을 세탁기에서 꺼내 거실에 비눗물을 질질 흘리며 화장실로 옮겼다. 화장실 벽을 손으로 짚고 뒤뚱뒤뚱 옷가지를 밟으며 생각했다. 가전 중 으뜸은 세탁기라고.


조지 오웰은 '원시적인 가사 노동의 굴레'라는 에세이를 썼다. 그 글에서 그는 설거지에 치를 떨었다. '가사 노동 해방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선 집안일을 돕는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의 바람대로 현대엔 가사도우미 가전이 보편화됐다. 조지 오웰이 바라던 식기세척기는 개발된 지 오래이며 나의 필수품인 세탁기는 가정집의 스테레오타입이다. 그러나 1903년생 조지 할아버지가 2020년의 나를 대실망할지도 모른다. 나는 매 달 일주일씩 손빨래의 굴레에 빠지므로.


손빨래든 발빨래든 내 몸을 움직여서 하는 빨래는 다 싫다. 하지만 세탁기로 해결할 수 없고, 세탁소에도 맡길 수도 없고, 남이 대신해줄 수도 없는 이 세상 유일무이한 빨랫감이 존재하나니, 그것은 나의 면 생리대다.


내가 비록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머리를 매일 감지 않는 친환경적인 인간이기는 하나, 만약 내 인체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인생 '일회용 생리대'가 있다면, 나는 차라리 환경에게 죄인이 되는 편을 택할 것이다. 나 같은 손빨래 혐오자가 면 생리대를 10년 동안 사용한 건 지구의 건강을 염려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내 건강 때문이다.


애초에 피부가 강철인 편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밀가루나 가공식품을 많이 먹으면 아토피가 올라왔다. 왼쪽 팔꿈치 아랫부분과 오른쪽 어깨 부위는 내가 섭취한 음식의 불량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어른이 된 지금도 밀가루를 흡입하면 오른쪽 어깨에 석류알 같은 물집이 잡힌다. 푹푹 쑤시고, 열이 나고, 간지러운 데다 빨리 낫지도 않는 골칫덩어리다. 피부가 약하지만 일회용 생리대는 곧잘 사용했다. 


일회용 생리대는 착용 시 공기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온갖 화학물질이 들어있는데 더 심한 것도 들어있다. 발암물질이 필요한 사람은 일회용 생리대 중 아무거나 사면된다. 시중 유통 생리대의 97%에 그것을 끼워 파는 중이니까. 이따위 생리대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서른 초반이 될 때까지 사용했다. 매달, 일주일 내내 쓰면서도 치명적인 거북함은 못 느꼈다. 다른 피부보다 더 민감한 부위였는데도 20년 가까이 견딘 셈이다. 아예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냄새가 나고 외음부가 가렵기도 했고 작은 염증도 종종 생겼다. 생리 종료 후 며칠 지나면 거의 다 나아지는 증상이었기에 참을 만했다.


출산 후, 나는 다른 몸이 됐다. 일회용 생리대를 쓰고 나면 외음부가 만신창이가 돼 버리는 것이다. 나는 팔에 작은 화상 흉터가 있다. 초등학교 때 입은 화상이다. 오래전 일인데도 그때의 쓰라림과 따가움, 가려움, 진물과 피를 기억한다. 그런데 외음부에서 느끼는 통증이 약한 화상의 그것과 엇비슷했다. 아이 낳고 나서 내 몸에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이것만큼 환장할 일은 없었다. 출산 전의 내 피부의 경도가 반건조 오징어였다면, 출산 후는 순두부였다. 일회용 생리대는 문자 그대로 내 피부를 할퀴었다. 살이 벗겨져서 피가 났다. 푹푹 쑤시는 거대한 염증이 많이 생겼다. 간지러운 정도를 1에서 10 사이로 측정해보라면 11이었다. 하반신 마취를 하고 싶었다. 사람 미치게 하는 가려움이었다. 무엇을 입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처참했다. 생리대 속에 작은 칼이 촘촘히 박혀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이런 트러블은 일회용 생리대 착용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생리가 끝난 후 그다음 생리 시작을 며칠 앞두고서야 피부가 겨우 아물었다. 한 달 내내 힘들여 나은 외음부에게 찾아온 건, 다시, 무시무시한 일회용 생리대였다.


내 피부가 급격 노화된 건지, 고장 났는지, 민감해진 건지, 20여 년간 화학 · 발암 성분을 견디고 견디다 드디어 빵 터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물건을 내 몸에 댈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내 몸은 나를 면 생리대의 세계로 떠밀었다.


면 생리대 상품 후기에는 신세계를 맛본 이들의 증언이 빼곡했다.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은 여성들이 내게 마구 손짓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세요. 빨리요. 당장요. 재미없고 귀찮은 집안일을 하나라도 덜 하기 위해 미니멀 라이프를 선택한 나, 세탁기 없이 못 사는 나, 그런 내가 꼼짝없이 매 달 일주일간의 손빨래로 입장했다. 통증이 귀찮음을 이겼다.


일회용 생리대와 면 생리대의 차이는 사포와 실크만큼 컸다. 실제 촉감이 그렇다기보다는 내 피부의 반응에서 그러했다. 면 생리대로 바꾼 후 냄새, 염증, 피부 쓸림, 가려움이 단번에 80% 호전됐다. 파격적인 변화였다. 상품 후기는 가짜가 아니었다. 면 생리대를 만들어주신 분께 사골곰탕 같은 진한 감사가 우러나왔다. 삶의 질은 수직 상승했다. 새롭게 부과된 손빨래가 귀찮지 않았느냐고? 핏물을 빼내는 빨래가 거북하지 않았냐고? 그까짓 거 한 달 내내 할 수 있다. 손빨래한다고 손이 벗겨진다거나 진물이 나거나 가렵진 않았으니까. 머리가 돌 것 같은 통증과 가려움으로부터 석방된 나는 차차 댄스를 췄다.


여기까지 면 생리대 광고였습니다, 는 뻥이다. 절친한 면 생리대 판매 업자 같은 건 없다. 

그렇게 10년간 면 생리대의 신세를 지고 살았다. 그러나 한 달 전, 나는 면 생리대에게마저 절망하고 말았으니…….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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