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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Dec 11. 2020

'외모 걱정'이라는 과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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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뚱보새> 노래 좀 틀어 주세요"


"<뚱보새>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 확인했다. 큰애는 그렇다고 했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제목이었다. 짧지만 분명하게, 싫었다. 고속도로에서 내가 탄 차 옆을 100km/h로 스치는 교통사고 현장을 본 기분이었다. 휙 지나친 까끌거리는 감정을 차분히 복기하기엔 나는 바빴다. 사소한 느낌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일에 임했다.


일손을 놓지 못하는 내 옆에서 <뚱보새>라는 동요는 노동요로 바뀌었다. 흥겨운 드럼과 브라스 소리에 이어 또렷하고 맑은 어린이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 위로 큰애의 목소리가 포개졌다. "학교에서 배운 노래인데요. 선생님이 집에 가서 여러 번 듣고 오라고 하셨어요. 가사가 진짜 재밌어요." 큰애는 <뚱보새>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 동생에게 이 노래가 얼마나 재밌는지 설파했다. 전방 주시하며 일상을 달려가는 내 귀엔 노랫말이 제대로 꽂히지 않았다. 노래를 극찬하는 큰애의 영업만이 귀에 박혔다. 큰애의 반응과 나의 느낌은 서로 밀쳐내기 시작했다. 힘겨루기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찰음이 새어 나왔다.


'겨우 제목 세 글자로 성마르게 불쾌해 할 일은 아니지. 제목과는 달리, 외모를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노래가 아닐 수도 있잖아.' '저런 제목에선 순수하게 재밌는 노래가 나올 수 없어. 큰애의 평가와 경쾌한 멜로디에 들어맞는 가사가 확실한 걸까….'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산적한 일거리를 갓길에 세웠다. <뚱보새>의 가사를 확인해야 했다.


"낭창낭창 나뭇가지 끝에/ 앉아있는 참새 한 마리/ 뚱뚱보가 될까 봐/ 남들이 놀릴까 봐/ 걱정이 태산 같아요/ 먹는 것도 없는데/ 언제 이렇게 몸이 불었지/ 혹시라도 저울이/ 고장 났을까 봐/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다니며/ 자꾸자꾸 몸무게를 재 본답니다"


이 노래가 우리 애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단다. 2006년 창작 동요제에서 대상까지 받은 노래이다. 자신의 몸과 불화하는 이의 주제가 같은 노래가 동요제 심사위원이나 교과서 편찬 위원들에겐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나 보다. 쓴 한숨이 나왔다. 의자에 등을 덜컹- 기대며 팔짱을 꼈다. 내 의지를 벗어난 눈물이 눈꺼풀을 왈칵 부풀려 놓았다. '뚱뚱하게 되는 것', '뚱뚱한 몸'을 희화화 한 가사에 그럴싸한 멜로디를 입혀 동요랍시고 만들었다. 외모를 수리하는 것이 인생의 중요 과제라는 프로파간다가 동요까지 침입해버렸다.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는구나. 어처구니가 없다. 맷돌을 갈 수 없어서 나의 집안일은 멈췄다. 흉악한 가사 앞에서 학부모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아이에게 물었다. "반 친구들도 이 노래를 모두 재밌다고 했니? 담임 선생님은 이 노래에 대해 다른 말씀은 없으셨니?" 아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


세상은 '비만'이나 '비만인'을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는 걸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 '비만인'에겐 그래도 된다고 누가 언제 허락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가끔 우리 사회가 이질성에 대한 면역력이 무척 낮다고 생각한다."* 고 말 한 유지원의 진단은 옳다. 몰상식한 우리 사회엔 암묵적으로 합의된 '정상 외모'라는 정형이 있다.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따가운 시선과 비웃음을 받는다. 장애인이나 노인의 몸을 대놓고 희화화하는 것엔 패륜이라는 인식이라도 있다. 그러나 비만인은 부담 없는 놀림감이 되어 여기저기서 소비된다.


예능 프로와 동요는 타깃층이 다르지만, 시대의 저속한 토양에 뿌리내려 같은 열매를 맺어 버렸다. 교과서에 실린 <뚱보새> 가사엔 사회의 상스러운 외모 인식이 교과서적으로 녹아들어 갔다. '뚱뚱하면 안 된다, 뚱뚱하면 놀림받을지도 모른다, 뚱뚱한 건 창피하다, 뚱뚱한 건 엄청난 스트레스다, 뚱뚱해지지 않도록 쉼 없이 자기를 단속해야 한다….'


비만은 '자기 단속' 버튼을 눌러 뚝딱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만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우는 건 폭력이다. 당사자의 의지나 절제력만이 비만의 원인이라는 해석은 게으르고 부실한 설명이다. 달고 짜고 기름지고 중독적인 음식을 저렴하게 찍어내는 기업,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일수록 자기를 돌볼 시간 · 돈 · 환경에서 멀어지는 사회 구조, 육체노동이 줄어든 현대 문명, 극도의 스트레스 시대에 가장 손쉬운 해소 도구로서의 정크푸드…. 이런 것들이 개인의 비만을 가속시킨다. 저런 스케일의 해일에서 개인이 손수 살아남기란 아득한 일이다.


<뚱보새>는 외모 극복이라는 짐을 홀로 짊어진 참새를 묘사했다. 이 노래를 부르는 학생의 형편은 다양할 것이다. 우선,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밝게 살아가는 비만 학생이 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그들을 업신여기며 가르친다. "너 참 꼴불견이구나. 네 생각은 틀렸어. 네 몸뚱이는 우스워 보여. 건강한 구석도 없고. 낯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런 몸은 당장 수선해야 돼. 넌 음식을 즐길 자격도 없어."


비만이거나 과체중인 자신의 몸을 괴로워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그들의 생각을 강화해 준다. "그래, 네 살은 끔찍해. 너에겐 감옥이고 남에겐 시각 공해야. 살찐 건 전적으로 많이 먹은 네 탓이니, 누굴 탓하겠어? 푸대접 당해도 할 말 없지 안 그래? 한 10kg 빼면 괜찮아 보일지도 몰라."


표준 체중임에도 스스로 뚱뚱하다고 오해하는 학생에겐 몸무게에 계속 몰두하도록 부채질한다. "너 지금 경계선에 있는 거 알지? 까딱하면 과체중 되는 거야. 네 모습에 만족하면 안 돼. 어제보다 바지가 더 끼는 거 아냐? 얼굴도 후덕해진 것 같은데?"


저체중인 아이들에게도 이 노래는 해악적이다. "넌 뚱보가 아니라서 좋겠다. 날씬한 게 최고야. 쟤네들은 살쪄서 얼마나 걱정이 많겠어. 비만 애들은 진짜 창피할걸? 저 애들은 따끔하게 외모 지적 당해도 싸. 그래야 살을 뺄 거 아니야."


자기 몸을 받아들이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비만인의 태도에 찬물을 끼얹는 쌀쌀맞은 노래. 스스로를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자기혐오를 지피는 노래. 그들이 앓는 열등감을 마땅히 감내해야 할 증상으로 못 박는 노래. 비만인의 아픔을 재미로 소비하여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노래. 비만인에게 범하는 실례와 오해, 사회의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노래. 참새마저 모욕하는 노래.

'예민 보스'나 '프로 불편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뚱보새>는 나에게 그렇게 들린다. 어째서 이 노래는 학생들의 금지곡이 아닌가?


참새도 빠져나갈 수 없는 외모 사찰일진대 그보다 부피가 커서 눈에 잘 띄는 인간 남녀노소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평균 체중인 내 남편은 과체중인 상사로부터 뱃살 지적을 받았다. 저체중인 둘째 아이는 친구에게 돼지라는 엉뚱한 놀림을 받고 울면서 집에 왔다.


하지만 외모로 인한 곤욕이 모두에게 평등한 무게로 돌아가진 않는다. 『다가오는 말들』에서 저자 은유는 말했다. "…외모 지상주의의 피해는 여성·노인·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쏠린다. 뚱뚱한 몸, 뒤틀린 몸, 노쇠한 몸은 추한 몸으로 간주돼 모욕·배제·차별에 쉬이 노출된다."


여성이 학창 시절에 화장을 하면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화장한다'라며 야단맞는다. 성인 여성이나 직장 여성이 화장을 하지 않으면 예의 없고 게으른 사람으로 찍힌다. 나는 대학 졸업반이 되도록 맨 얼굴로 다녔다. 어느 연장자가 쌩얼의 나를 조용히 불렀다. 나이도 있는데 화장 좀 하고 다니라며 꾸중을 했다. 얼굴에 무엇을 칠하느냐 마느냐는 그 얼굴 주인이 판단하는 게 맞다. 그러나 화장에 대한 여성 개인의 판단을 사회는 존중하지 않는다. 성인 여성의 얼굴은 유독 '놀라움', '가려야 하는 것', '아프지 않은데도 병색인 것', '부끄러운 것'으로 조작된다. 여성 연예인의 민낯이 숭배 또는 조롱의 흔한 표적이 되는 것이 대표적인 증거다. 한편 화장과 민낯 때문에 여성만큼의 곤란을 겪는 남성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얼굴색뿐 아니라 얼굴형도 문제가 된다. 표준 미인 얼굴형(출처 미상)에 부합하지 못한 얼굴은 '코가 낮다', '눈이 작다',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턱이 두 개다'라는 식으로 오답 처리된다. 표준 얼굴형에 부합되고 싶어서 얼굴에 손을 대면 '성형미인'이나 '강남 언니'라는 조롱을 당한다. 그러나 성형한 남자를 비하하는 '성형미남'이나 '강남 오빠'라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자 연예인의 몸무게는 추적 관찰된다. 그녀의 몸무게 변동은 그녀의 광고 계약, 영화 계약, 화보 촬영 등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준다. 그녀의 부피는 그녀의 값어치에 지나친 기여를 한다. 연예인이 아닌 여성들의 경우도 피장파장이다. 미인 대회 참가자도 아닌데 여학생, 여성 직장인, 성인 여성, 엄마, 할머니들에게 외모 성적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대부분은 낙제점을 받는다. 피땀 흘려 살을 뺀 상위 0.01%의 '자연 미인'만이 우등생이다. 그런데 '자연 미남'이라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영부인의 옷은 헤드라인에 오른다. 기사와 댓글에서 주목받고 지탄받고 해석된다. 아름답게 입으면 사치스럽다고고, 평범하게 입으면 패션 외교에 무능하다고 욕을 먹는다. 영부인만 욕보는 건 아니다. "끔찍할 정도로 많은 경우, 여성들은 회사에서의 옷차림과 메이크업으로 욕을 먹는다."** 한편, 남자 대통령의 패션 감각을 비판하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록산 게이는 이렇게 썼다. "소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날씬하고 아담해야 한다고. 자리를 많이 차지해선 안 된다고. 남자들 눈에 보기 좋아야 한다고. 사회에서 받아들일 만해져야 한다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알고 있다. 우리는 점차 작아지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나는, 작지 못한 소녀였다.





(다음 글에 계속)








*. 유지원, 『글자 풍경』, 을유문화사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한겨레출판사

***. 록산 게이, 『헝거』, 사이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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