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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Dec 05. 2020

이 바쁜 때 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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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가락에 달라붙은 버릇이 있다. 손가락의 손톱처럼 합체된 것이다. 만성이 된 행동이라 멈추기 어렵다.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문장이 끝나면 기계적으로 마침표를 누르는 행위. 이 숙달된 동작이 때론 곤란하다.


책을 다 읽으면 문장 몇 줄을 솎아 발췌한다. 손글씨로 쓰는 건 힘들어서 컴퓨터 메모장이나 블로그에 적어둔다. 웬만한 문장들은 가래떡 뽑히듯 모니터로 술술 들어온다. 그러나 시를 옮길 땐, 떡 잘 뽑던 제병기가 덜그덕 거린다. 다섯 번째 손가락의 자동화된 관습이 자꾸 사족을 만들어서다. 문장 끝에서 으레 점을 찍어버린다. 시에는 마침표가 거의 없는데도.


시 속의 마침표가 도시 밤하늘의 별처럼 적은 이유가 궁금했다. 시 속에선 문법보다 시인의 의도가 한 수 위라서 그렇단다. 점 하나만큼이라도 감동을 더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시인은 마침표를 찍는다. 시에선 시인이 법이다.


처음엔 시의 저런 문법에 대해 몰랐다. 마침표 없는 시를 '열린 결말'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했다. 점으로 막히지 않은 시들은 시집 속에서 마음 안으로 능청스럽게 연장되는 것 같았다. 무無마침표는 '진행 중'을 암시하는 장치가 아닐까. 시에서 사람에게로 뭔가가 중단 없이 흘러가는 걸 허락한다는 장치 말이다. 끝 · 한계 · 종료가 없는 세상에 살던,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시가 독자에게 폴폴 건너온다. 시의 다음 행은 읽은 이의 마음으로 이사하여 그곳의 기후에 맞게 자라난다. 미완성이라는 의미가 아닌 확장의 승낙으로서의 무無마침표가 나는 반가웠다. 시인들은 바랐을지도 모른다. 사유와 감동과 아름다움이 마침도 없는 곳에서 실컷 뻗어나가기를.


그제 치러진 수능 국어 영역에서 시 두 편을 보았다. 이용악의 「그리움」이라는 시와 이시영의 「마음의 고향 2-그 언덕」이 그것이었다. 두 시는 시험지에서 (가)와 (나)라는 삭막한 이름을 얻었다. 시에 엮인 43, 44, 45번 문제를 풀어보았다. ⑤번, ②번, ④번. 확인해보니 정답이었다. 국어 영역에서 적어도 7점 이상 받을 수 있겠구나. 자부심이 차올라 떡볶이로 자축… 하지는 않았고, 마침표 없는 시 두 편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누구에겐 ①번과 ③번도 정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응시생들에게 혼란을 주려는 의도는 결코 없음. 네버 네버). ⑥번과 ⑦번과 ⑧번 같은 답들은 좁은 시험지에 갇히는 일을 다행스럽게 면했다. 그 답들은 유일한 해석이라는 족쇄를 피해 도망쳤다. 시험지 대신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피신했다. 거기서 아기 고양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몸짓을 하며 뛰놀고 있을 거다.


무한한 답을 품은 시를 마음에 새겨놓고 싶다. 새끼손가락의 지독한 습성을 다스리는 수고 따위일랑 흔쾌히 감내할 테다. 시의 조각들은 투명한 계곡물 아래에서 알록달록 빛나는 동그란 돌멩이들만큼 곱다. 주워 담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하겠다.


시를 읽을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아, 시인들은 왜 이런 거야. 어떻게 이런 거야." 욕 아니고 감탄이다. 고마움이다. 질투이다.


시인들에게 가장 샘 나는 건, 물감 없이 그림을 그리는 재주이다. 시를 읽으면 글씨 말고 장면이 보인다. 이런 착시현상은 뭘 먹어야 발휘할 수 있는 거지. 안타깝게도 떡볶이는 아닌 것 같다. 떡볶이 먹어서 시 잘 쓰게 되는 거면 난 이미 김영랑. 그림 그린다고 끄적거리는 나보다 시인들이 더 나아 보인다. 태블릿 펜을 꺾어야겠다.


시는 내 기억 속 사람들의 생가生家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누구의 어떠한 시든, 시를 읽으면 거기서 내 사람들이 걸어 나온다. 밥 먹고, 웃고, 일하는 생생한 그들이 시 안에 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미안한 사람, 깊은 잠에 빠져 살이 차가워진* 사람들이 시집이란 집에 거주한다. 이 한결같음이 이상하다. 시인들끼리 작당을 했나 보다. 내 깊은 마음속 그들을 어떻게 빼낸 걸까. 개인 정보 침해 사례로 고발한 뒤 취조해봐야겠다. 내 사람들을 시 속에 넣어 둔 비결이 뭔가요. 당장 부세요.


시는 나를 자주 울린다. 어떤 시집을 읽을 땐 중간중간 책을 덮어야 했다. 시에 담긴 슬픔이 나에게로 옮겨지다 못해 견딜 수 없을 만큼 과적돼서였다. "차오르는 눈물만큼 나는 무거워졌을까"** 눈물을 흘려내어 슬픔을 가볍게 한 후 나머지를 읽었다. 그렇다고 내가 마조히스트는 아니다. 슬픔에 잠기려는 목적으로 시를 읽지는 않는다. 밝은 시도 좋아한다. 다만 시의 슬픔엔 온기가 돈다. 시인은 통역사이다. 말글로 표현하기 힘든 거대한 설움에 절여진 사람들을 돕는다. 땀 흘려 고른 글자로 풀어놓은 슬픔은 시인이 나눠 흘린 눈물이다. 우는 자들과 같이 울어주는 듯한 슬픈 시가 고맙다.

김소월 시집만은 예외다.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다. 너무 버거웠다. 서글픔의 극에 내몰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가히 희대의 시인이었다.


다 읽은 후에 품에 꼭 안아본 시집도 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받은 감동이 고맙기도 했고, 그 감동을 마음에 붙여놓고 싶기도 했다.


감동받았다고 해서 시를 다 이해한 건 아니다. 한 번 읽는 걸로는 이해가 안 되는 시가 더 많았다. 그런 시들은 이리저리 상상하며 곰곰이 읽었다. 제목을 힌트 삼아 읽어보기도 한다. 어떤 시는 암만 읽어도 모르겠다가 필사할 때 이해한 적도 있다. 그럴 땐 암호를 해독한 수학자처럼 얼굴과 마음이 몽땅 상기된다.

그럼에도 모든 시를 다 독해할 순 없었다. 허다한 물음표만 남긴 채 시집의 페이지를 넘긴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시인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김이경도 『시의 문장들』에서 시 문외한들에게 용기를 줬다. "절친한 친구라고 해서 그 속을 다 알 수는 없듯이 시도 그냥 느낌으로 읽고 좋아하는 게 먼저다."


낱낱이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도 어떻게든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보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심술쟁이다. 시에 글자 수가 적은 건 그런 맥락과는 다르다. 불친절함을 행사하는 게 아니다. 겸손하며 수줍은 시의 성미 탓이다. 너무 많은 말을 듣느라 녹초가 된 귀를 위해 말수를 줄인 거다. 조용한 시를 대하면 마음이 평정심으로 회복된다. 시는 마음의 초청이 있은 후에야 미소 지으며 그곳으로 방문한다. 마음에 자리 잡은 시는 잠잠히 팽창한다. 작은 단어 하나가 바람에 부푼 돛처럼 커다래진다. 제 몸보다 커다란 선물을 내 속에 자꾸 풀어놓는다.

(혹)은 뜻이 가장 긴 한자이다. "몸을 숨겼다가 갑자기 나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소리"라는 뜻을 가졌다. 저 한자는 시를 닮았다. 단 한 글자 안에 긴 뜻을 품었다는 면에서, 문 뒤에 숨겨질 왜소한 몸집으로도 사람을 경탄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시'와 '가성비'라는 단어를 나란히 놓는 건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적어본다. 시집을 읽는 것보다 가성비 좋은 독서는 없다.


그러니 잘 고른 시집 하나 열 소설 안 부럽다(소설 사랑합니다. 충성 충성). 대부분의 사람이 좁은 집에서 사는 현실만 놓고 봐도 그렇다. 협소한 집에선 많은 책을 데리고 사는 게 불가능하다. 좁다란 집에 사는 독서가에겐 일당백을 하는 시집이 효서孝書가 될 수 있다. 나에게 책장이 생긴다면 시집부터 사 넣을 거다. 시를 읽을 때마다 이런 허영심에 빠져 히죽거린다.


아직은 대부분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되돌려 줘야 하는 책이라서 발췌 습관이 생겼다. 언제고 들여다볼 수 있도록, 나를 붙잡았던 문장들을 메모장에 붙잡아 둔다. 발췌 다 해놓고도 최대한 반납을 유예하는 것은 시집뿐이다. 산문 책도 하루 이틀이면 다 읽는데 시집은 14일 내내 질질 끌며 읽는다. 연체 기한에 걸리지 않을 때까지 붙잡아 둔다. 냉큼 이별하기엔 너무 아쉽다. 다 읽은 지 오래고 발췌도 다 해두었건만 아쉬움 때문에 시집에게 질척거린다. 몇 번이나 어루만지며 거듭 펼쳐본다.


 바쁜   시냐고 내가 나에게 물어보았다. 시는 정답이 없어서 자유롭다. 포대  쌀알만큼 고운 말이 소복하다. 32K 해상도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마음에 띄워 준다. 사람을 기억나게  준다. 눈물을 글자로 조심스럽게 해석해 준다. 숨은 감동이 있다. 샐러드에 뿌려 먹는 사과 농축 식초처럼 의미가 맛있게 압축돼 있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다시 시를 읽으러 가야겠다. 볼 때마다 웃어버려서 묘하게 미안해지는 시 한 편 풀어 놓고.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 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김용택, 「이 바쁜 때 웬 설사」











*. 박준, 「잠의 살은 차갑다」에 나온 표현에서 차용,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신철규, 「손톱이 자란다」,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이병률, 「청춘의 기습」, 『바다는 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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