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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Dec 12. 2020

'외모 걱정'이라는 과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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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 이어)




어릴 때부터 나는 통통했다. 중학생 이후 과체중이 되었다. 고등학교 땐 비만에 가까웠다. 말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엄마는 나를 돼지나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를 비하하는 건지 나를 비하하는 건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그랬다. 혹여 내가 까먹을까 봐 '살이 뒤룩뒤룩 쪘다'라는 지적을 꾸준히 하셨다.

얼굴에 대해서도 좋은 말을 못 들어 봤다. "코가 납작하다, 얼굴이 더럽다(뾰루지가 돋았을 때 들은 말), 얼굴색이 그게 뭐냐, 점이 왜 그렇게 많냐."

내 패션에 대한 피드백도 아끼지 않으신다. "안 어울린다, 무슨 러닝 같은 걸 입고 나왔냐, 뭐 그런 걸 괴상한 걸 입고 있어, 갖다 버려라, 100kg 넘게 찌고 싶어서 그러냐(루즈 핏 옷을 입었을 때 들은 말)" 엄마 외의 다른 사람에게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고등학생 땐 조금 다른 일도 있었다. 교회 지휘자 선생님과 엄마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그 옆에 동그마니 서 있었다. 우리 셋은 알고 지낸지 오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선생님께 뜬금없이 날 소개했다. "얘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하하하"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반대인데요. 제가 볼 땐 속에 생각이 아주 많아요."

립 서비스라곤 1%도 섞이지 않은 선생님의 진중한 뉘앙스에 엄마는 움찔했고 나는 어리벙벙했다. 선생님은, 뒤룩뒤룩한 살 속에 숨겨진 내 복잡한 마음을 감지하여 말로 표현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마음을 고려 받은 경험은 가슴 뭉클했다. 오랜만에 내 이름이 불리는 것처럼 설렜다.


아쉽게도 누군가가 나의 내면에 신경 써주는 일은 매우 뜸했다. 피상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익숙했다. 나는 책처럼 읽혔다. 주 낭독자는 엄마였다. 특이점이라면 본문은 관심 밖이고 표지에 대한 비판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징그러워 하는 내 마음을, 엄마는 읽지 못했다.


엄마는 자기 자신도 읽는다. 자신의 표지 디자인을 착실히 비판한다. "나는 10kg를 빼야 해." 이것이 엄마의 대표 멘트이다. 엄마는 과체중인 자신의 몸을 싫어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지적하는 것도 싫어한다. 수십 년 전 엄마를 노엽게 한 사건이 있다. 큰어머니가 우리 엄마의 배를 보며 "배가 왜 그리 나왔어? 셋째 임신했나 봐?"라고 빈정거린 사건이다. 엄마의 이 에피소드는 수십 년간 생명이 연장되어 셀 수 없이 반복 발화되는 중이다. 그때마다 싱싱한 분노가 함께 발음된다.


엄마의 질긴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임신 운운하는 개떡 같은 '외모 지적'을 나와 엄마는 시간차를 두고 동반 체험했다.

임신은 나를 가장 뚱뚱하게 만들었다. 애 낳고 모유 수유하면 살 빠진다고 한 사람 누구야? 첫아이를 2년 가까이 모유 수유했지만 나는 한결같이 과체중이었다. 그런 나를 본 지인이 물었다. "배가 왜 그렇게 나왔어요? 벌써 둘째 임신했어요?" 웃음을 머금은 씩씩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니라며 손사래쳤다. 부끄러운 듯이 마구 웃었다. 등신처럼.


다른 사람이 자신의 외모를 허물하는 것에 분노하는 엄마. 동시에 다른 사람과 자신의 외모를 판단하는 엄마. 엄마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 절여진 시민이다. 이 사회의 피해자이고 참가자이며 가해자이다.


엄마의 단골 멘트가 '나는 10kg 빼야 한다'라면 나의 단골 멘트는 '나는 내가 싫어'였다. 내 자존감은 그 어떤 마찰력이나 공기저항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우리 집 장판과 바닥과 지각을 차례로 통과하며 유령처럼 가라앉았다. 우주의 바닥을 향해 멈추지 않고 추락했다. 낮은 자존감의 이유 중 하나는 외모였다. 뚱뚱한 내가 부끄러웠다.


지금의 나는 평균 체중이다. 자연 식물식 위주 · 채식 위주 식단을 3년 가까이 먹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럼에도 내 몸을 매일같이 떳떳하게 생각하지는 못한다. 자기 감시라는 타성의 늪에서 다 못 빠져나왔다. 100점이 아닌 몸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거짓말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에게 내면화된 탓이다. 어느 날은 거울 속 나를 보며 스스로 말해준다. '너의 몸은 괜찮다, 성실히 너를 돌보느라 수고가 많다, 너의 존재는 소중하다.' 어느 날은, 그냥 나를 보기 싫다.


이런 태도는 남을 향하기도 한다. 비만인을 향해 반사작용처럼 속에서 말이 솟을 때가 있다. '저런 몸은 아플 텐데, 힘들 텐데, 마음에도 병이 들 텐데,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뇌피셜을 주접스럽게 늘어놓는다. 내가 경악하는 렌즈를 내 눈에 끼운 것이 부끄럽다.


외모지상주의 종양을 제거하는 건 어려운 수술이다. 체중 감량보다 더 어렵다. 장기란 장기에 다 유착된 암덩어리를 잘라내는 것과 같다. 초등 교과서부터 집, TV, 직장에까지 외모에 대한 집념이 껌처럼 붙어있다. 그렇다고 치료를 포기할 순 없다. 참되게 살려면 외모 집착증을 고쳐야 된다. 평생 입고 살아가야 하는 몸을 매 순간 모질게 대하며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므로.


체중계로 측정되는 중량으로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유해한 삿대질을 내 검지에서 벗겨내고 싶다. 외모지상주의에 복속하는 대신,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모든 창조물들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 다던 신의 시선을 닮고 싶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깃든 '좋음'을 보기 위해 시력을 연마해 본다.


완치를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도 필수적이다.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환대 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것은 외모 걱정을 고치는 특효약이다. 껍데기에 연연하던 얕은 시야를 절제한 후 천리안으로 이식해 준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는 신의 말씀과 한결같이 따뜻한 남편의 존재는 내 아늑한 묘약이다. 누군가에게는 친구나 자녀, 반려동물이나 이웃, 책과 같은 존재도 명약일 것이다.


내가 분투했고 여전히 분투하는 것에서 아이들 역시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 있는 그대로의 몸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걸 세상은 방해한다. 우리 문화는 겉을 보는데 너무 바빠서 존재의 속과 진가를 읽는 능력엔 형편없다. 자본주의 시장은 화장품, 수십 가지 필터가 제공되는 카메라 어플, 새 옷, 다이어트 약과 제품, 성형, 시술, 주사, 피트니스센터 등으로 미달된 몸을 수리하라며 지갑을 갈취한다. 아이들이 이런 세상과 문화와 시장에 물들고 시달릴 과정을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이런 세상과 문화와 시장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닮았다. 신화 속 침대에서 나그네들은 살해당했다.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다리는 잘렸고 침대 길이보다 짧은 다리는 늘려지는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사회가 정한 신체 표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피땀 흘려 몸을 세련한다. 그럴만한 돈과 시간과 방법이 없어서 저열한 자기 몸을 입고 살아야 하는 사람은 타자들의 삿대질에 난도질을 당한다. 신체 사이즈를 이유로 자신과 타자를 살해하는 이야기 따위는 신화 속에만 존재하면 좋겠다. 책 속에 봉인되지 못한 괴이한 현실이 애달프다.


미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갖는 것은 자유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엔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은 복된 일이다. 운동으로 내 몸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행위, 음식을 가려먹으며 건강한 몸을 일구는 노력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 행위와 노력이 외모 집착과 건강 염려증으로 변질되면 고단해진다. 그 행위와 노력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밀면 억압이 된다. 자신의 미적 기준에 누군가의 몸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빨을 드러내며 수런거리는 자여, 입을 닥치라.


복잡한 머릿속을 대충 정리한 후 큰애를 불렀다. <뚱보새>를 들은 내 마음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설교 조가 되지 않게, 강요나 혼내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너무 말이 길어지지 않게 조심했다. 1분 정도의 내 이야기를 듣는 큰애 표정이 묘했다. 어색한 감정이 얼굴에 스치기도, 양 볼을 부풀리기도 했다. "<뚱보새> 노래는 뚱뚱한 학생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라는 내 말에, 어느새 옆으로 와서 나의 소회를 듣던 둘째 아이가 "그러네?"라며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먹고 쌀 때마다 바뀌는 수치 따위는 인간을 가만히 정의하는 고유명사가 될 수 없다. 아이들이 그램 수를 초월하는 생의 진귀한 무게들에 착념하면 좋겠다. '수려한 외모'라는 신기루에 홀리지 않길 소망한다. 매 순간 재생되고 노화되느라 끊임없이 변동 중인 피부의 한 장면으로, 빈약하고 무례하게 타인을 정의 내리지 않길 기대한다. 자신에게 속한 어떤 종류의 중량감이든 그것을 구실로 자신을 홀대하지 않길 바란다. '외모 걱정' 과목일랑 빵점을 받는 아이들이 되면 좋겠다.









*. 쉬운 성경, 창세기 1:31중

**. 개역개정 성경, 사무엘상 16:7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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