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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Dec 31. 2020

성적을 무조건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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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런 학원에는 누가 가요? 아무도 안 갈 것 같은데요?"

아이들 손잡고 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길가 전봇대들에 학원 전단지가 조르르 붙어 있었다.

< 과목: 국어, 영어, 수학 / 월 00만원 / 학생의 성적을 무조건 올려 드립니다. 그날 분량의 공부를 다 못하면 집에 안 보내겠습니다. >

호기심 많은 큰애가 저 광고를 유심히 읽더니 표정과 말의 뉘앙스를 몽땅 동원하여 어이없어했다.


"공부를 다  못 마치면 아이를 집에 안 보내준대요! 그럼 안되는 거 아니에요? 너무 힘들잖아요."

"그러게. 근데 자기 애 성적이 꼭 오르길 바라는 부모도 있어. 그런 부모들은 저런 학원에 애들을 보낼 수도 있지."

"으아~ 나 같으면 너무 싫을 거 같아요. 난 엄마가 그런 부모가 아니라서 너무 좋아요."


광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큰애가 귀엽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어이없는 일에 시달릴 새 없이 자유자재로 살길 빈다. 성적 향상을 장담하는 학원의 문구엔 불신이 솟았고, 대단한 다짐인 양 써놓은 비인간적인 문장엔 만정이 떨어졌다. 어그러진 우리나라 교육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흐려진다. 불행히도 난 학부모이다. 무력하게 한숨 쉬는 대신 부지런히 학부모 노릇을 해야 한다. 저런 학원에 내 아이를 온 힘 다해 보내지 않는 것이 나의 첫 번째 학부모 노릇이다.


우리나라는 자녀 교육에 많은 돈을 쓴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보내려고 그런다. 저성장 시대로 갈수록 뾰족한 삶의 대안이 없으니 이런 식의 가족 경영은 더 강화되고 만연된다. 난감하게도, 학부모라는 이름을 달자마자 내 취향과는 상관없이 주류 교육의 흐름에 노출됐다. 교육 시장은 학부모의 마음을 호리려고 호시탐탐 꿀렁이는 거대 해류였다.


우리 집 아이들은 병설 유치원에 다녔다. 병설 유치원은 학비가 없었다. 학비뿐 아니라 유치원 체육복, 유치원 가방, 학용품, 소풍 비용 등 유치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모오오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해 줬다. 병설 유치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애들이 다닌 곳은 그랬다. 나와 남편은 유치원 입학 신청서를 내러 가는 길에 마음을 졸였다. 정원이 다 찼을까 봐. 신청서를 낸 우리는 입을 떡 벌렸다. 지원자가 미달이라서.

매년 그랬다. 도합 4년 동안 아이들을 같은 병설 유치원에 보냈는데 연말마다 이 유치원 홈페이지엔 '추가 원아 모집 공고'라는 글이 올라왔다.


내가 유치원에 바라는 건 두 가지였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즐겁게 놀 것. 유치원에서 심각하게 다치거나 죽지 않을 것. 끝. 유치원에 기대한 항목 중 '공부'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유치원에 요구하는 심플한 기대와는 별개로 이 유치원의 질은 훌륭했다. 선생님도 다정하셨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좋아했다. 나와 남편은 이런 유치원에 지원자가 적은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학부모들이 다 나 같진 않나 보다. 같은 동네의 비싼 사립 유치원은 붐볐다. 악기와 수영과 영어를 가르쳐주는 유치원으로 아이들이, 아니 부모들이 몰렸다. 자기 애를 어렵사리 입학시킨 부모들은 기뻐했고 축하를 받았다. 유치원부터 이런 분위기였으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부모들이 지갑을 넓게 여는 건 떡볶이 앞에서 입을 넓게 여는 것만큼 당연했다.


2010년에 출판된 『아깝다, 학원비』 책은 우리나라 자녀 1인당 평균 사교육비를 소개한다. 매달 30-40만 원이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사교육비를 쓸 수 없는 저소득층까지 반영한 수치라서 일반 가정의 사교육비 부담은 더 높을 것이다. 더구나 저 책이 나온 후 10년이 흘렀다. 물가 상승비까지 고려하면 사교육비는 더 올라간다.


밥 먹는 게 너무 좋은 나는, 교육비보다 식비에 관심이 많다. 코로나 덕에 우리 가족 네 명은 대부분의 식사를 집에서 해결한다. 지인에게 가끔 얻는 소소한 나눔 음식들 외엔 마트나 농산물 시장 등에서 식재료를 사 먹는다. 가계부에 적힌 우리 집 식비는 9월에 602,098원, 10월에 445,974원, 11월에 497,050원, 12월에 631,270원이 나왔다. 한 달간 네 명이 배불리 먹고사는데 대략 55만 원이 들었다. 가계부에 이런 숫자를 적는 나는, 자녀 둘 사교육비로 100만 원 가까이 지출하는 바깥의 추세가 부자연스럽다. 머리에 들어가는 것과 입에 들어가는 비용의 차는 왜 이리도 큰가.


아직 끝판왕이 남았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대학 학비가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부모나 학생을 빚쟁이로 내몬다. 천주희는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책에서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사람이 8년 동안 생활하는 데 드는 기본 생활비용'을 계산했다. 약 2억 원이었다.


학력주의의 허상을 다들 안다. 알지만 고학력이 평준화된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사회인이 되기 위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고통스러운 비용을 지불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은유 작가는 『다가오는 말들』에서 말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공부하지만 공부하면서 사람답게 살기는 퍽 어렵다." 부모는 자녀 잘 되라고 공부 뒷바라지를 하며, 자녀는 그런 부모에게 부채감을 느끼며 공부를 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는 사람답게 살지 못할 위험에 노출된다. 재정 부담뿐 아니라 시간, 소소한 일상, 삶에 대한 자유로운 탐색, 다정하면서도 독립된 가족 관계 등이 골고루 위협받는다.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에 투자하는 공부 전략은 계절도 안 타고 유행이다. 문제는 고생 끝에 학위와 스펙은 와도 낙樂까지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데 있다. 학력주의는 환수가 불투명한 작전이다. 일자리도 협소한데다 오늘 배운 지식이 며칠만 지나도 구닥다리가 되는 세상이므로.


구본권은 『공부의 미래』에서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므로 교육의 주 목적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에 초점을 맞추는 공부로는 그런 힘을 기를 수 없다. 지식의 짜임이 쉼표 없이 재편되는 시대에서 살아남는 최적의 방법은 '지치지 않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학습자'가 되는 것뿐이다. 이런 문맥에서도 사교육은 해롭다. 학원이 학생의 성적을 올리는 방법은 단 하나,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문제를 반복해서 풀게 하는 것이다. 반복 학습 자체엔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학원의 '학습 노동'은 학생을 지치게 한다. 네버 엔딩 문제를 수습하느라 바쁜 학생은 공부한 내용을 능동적으로 소화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김영민은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먹어도 살 안 찌는 체질 같은 건 없을지 몰라도, 공부해도 잘 안 찌는 체질은 있다. 자발성이 장착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렇다."


나는 아이들을 학원 대신 도서관에 데리고 간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무용한 독서는,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당장 필요하다고 포장된' 공부와 다르다. 스스로 책을 찾아내고, 고른 책을 읽어내고, 읽은 내용을 사유하는 과정은 빈틈 없이 자발적인 행위이다.


강백향은 『초등 공부 독서가 전부다』에서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서관에 담긴 다채롭고 방대한 문화 속에서 나의 관심과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책의 줄기를 찾아가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큰애와 둘째 아이 모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즐겨 읽는다. 큰애는 역사책을 가장 좋아하고 다른 분야에도 호기심이 많다. 게걸스럽게 책을 읽는 편이라 내가 부지런히 도서관에서 책을 날라다 준다. 둘째 아이는 다섯  때까지 엄마 아빠라는  밖에 못했고, 초등 입학 때까지 한글을   읽었다. 1학년 5 29일에서야 처음으로 혼자   권을 읽었고, 1학년 말엔 마침내 편안한 네이티브 스피커가 됐다. 우리말에 겨우 익숙해진 둘째 아이의 꿈은 작가다. 아이는 자기 책상 앞에 이렇게  놓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 작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 국어 공부 잘하고 여러 가지 책들을 읽고 맞춤법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보람된 점 : 내가 만약에 책을 낸다면 사람들이 나의 글과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 강경수, 대브 필키, 하라 유타카, 제로니모."


아이가 작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독서력을 바탕으로 학교 공부를 척척해내는 아웃풋이 없어도 괜찮다. 여전히 둘 다 수학에서 죽 쑤고 있고, 그걸 가르치느라 나는 가끔 돌 것 같지만 그마저도 상관없다. 아이들이 자발적인 독서가가 된 것, 책 속에서 호기심과 관심을 주워올리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김영민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에서 이렇게 썼다. "무턱대고 살아있는 고전의 지혜 같은 것은 없다. 고전의 지혜가 살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고전 자체의 신비한 힘 때문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공들여 읽고 스스로 생각한 독자 덕분이다." 같은 책에서 그는 또 말했다. "삶과 세계는 텍스트"라고.

책의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를 해석할 시력을 키워주는 일. 아이 스스로 추동하는 독서를 격려해주는 일. 이것이 나의 두 번째 학부모 노릇이다.


학원파가 아닌 도서관파라고 해서 내가 학원을 결사반대하는 건 아니다. 큰애는 스스로 원해서 피아노 학원에 수년째 다니고 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어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인터넷 강의나 학원의 도움을 한시적으로 받게 할 의향도 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아이가 시험 점수와 등수에 자신의 정체성을 대입하지 않도록 더욱 도와주고 싶다. 학교 공부든 인생 공부든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 디폴트가 되도록 격려해 주고 싶다. 세상은 정신없이 변한다. 매일같이 덮치는 변곡점마다 일타강사를 붙잡고 "여기선 어떻게 사는 게 정답인가요?"라고 물어볼 수 없다. 누가 찍어준 답을 머리에 욱여넣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생활 방식의 표절이다. 쉼 없이 달라지는 지식에 적응하고, 좌절 없이 스스로 줄기차게 파고들며, 자신만의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남는 공부가 아닐까.


사람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로봇의 정보 처리 능력을 앞지르긴 힘들다. 좋은 소식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기계가 지니지 못한 연장 꾸러미를 가졌다는 점이다. 인공지능 세상에서 살아남는 인재는 인간만의 무기-인격, 협업 능력, 사회성, 의사소통 능력 등-를 잘 발휘하는 사람이다,라고 계산적인 투로 인간성 운운하려니 민망하다. 그건 그냥 원래 중요한 건데.


공부를 많이 못 해 본 황보출 할머니는 뭐가 중요한지 아셨다. 황 할머니는 초등학교 문턱도 못 밟아 보셨고 70세 때에야 처음으로 한글을 익혔다. 스펙도 학벌도 없는 황보출 시인은 지긋이 노래했다. "이 세상에 공부 잘한 것이 큰 자랑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살려면/ 사람 간에 의리 있고/ 서로 정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자랑이다./ 공부 잘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정답게 사는 것이 자랑이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게 기말 평가 문제를 출제해본다. "위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위 시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상과 우리나라 학교에서 배출하는 인간상 중 세상에 더 적절한 유형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자랑'의 내용과 거리가 먼 것은? 위 지문이 교과서에 실릴 확률은?"


가상의 학원 전단지도 상상해본다.

< 과목: 의리, 정, 협동 / 학원비 무료 / 학생의 인격을 무조건 올려 드립니다. 그날 분량의 인격을 다 못 갖춰도 집에는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학원은 병설유치원보다 더 미달이려나.













*. 천주희,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 황보출, 「공부 잘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뒷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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