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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06. 2021

최고 권력자의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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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 작가는 말했다. "평범하게 이어지는 일상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 이 문장에 따르면 거의 행복하지 않았던 2020년이 끝났다. 이병률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지난 1년간 온 세상 사람들이 사무치게 배운 진리이다.


나도 저 큰 낱말을 분실했다. 코로나19가 침투할까 봐 보초 서듯 살았다.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을 들었고, 나의 집안일은 늘어났고, 자유시간은 축소됐다. 내가 하던 일에서 연속 서른 번의 불합격을 했고, 총 64번의 낙방을 했으며, 슬럼프가 왔다. 어떤 성취도 기록되지 못한 365일이었으나 이상스레 다망하고 피곤했다. 무던한 구석이라곤 없는 신종 열두 달이었다.


한편, 남궁인은 앞의 책에서 이렇게도 말했다.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기존에 하던 일을 추진할 동력을 잃은 나는, 하고 싶은 걸 저질렀다. 아무도 의뢰하지 않은 글을 썼다. 독자는 나였다. 클라이언트가 없지만 그림을 그렸다. 감상자는 또 나였다. 일하느라 바빠서 못 읽었던 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순수한 쾌락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무명의 내가 대책 없이 즐겼다. 소로의 생각에 크게 공감하면서. "…여태껏 누려온 무명과 가난이 얼마나 이로운지 깨닫게 된다. 나는 거리낌 없이 화려한 자유를 누리며 왕 못지않게 당당하게 생각했고 시적인 여가를 즐기며 한 해를 보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밤. 가족들과 껴안으며 새해를 축하했다. 잠자리에 누워 2020년을 조용히 톺아보았다. 평범은 유실됐으나 충분히 이로운 시간이었다. 한 해를 즐거이 누렸고 새해를 막 선물 받았으니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신년을 맞아 새롭게 다지는 각오는 없다. 목표도 없다. 지금 내가 산책 중인 땅, 에세이와 그림 작업과 책 읽기의 영토에서 그저 서성거릴 생각이다. 이 활동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끄적거리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연료가 필요하다. 내 마음을 출처로 둔 쾌락, 독자의 시선, 구체적인 보상이 그 연료들이다. 이게 없으면 작업은 지속 불가능하다. 지난 6개월 동안 거의 쾌락만으로 글을 썼다. 보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독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내 글의 조회 수가 적은 건 충분히 이해된다. 내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세상 천지에 재미있고 의미 있고 멋진 볼 거리가 범람한다는 게 더 큰 이유이다. 그런 비상한 것들 대신 내 글을 봐준다는 게 도리어 불가사의한 일이다. 산골짝 음지에 돋은 잡초 같은 내 글을 봐 주는 극소수의 진심 어린 독자들은 나를 연명시켜주는 비며 이슬이다.


연료의 성분 농도가 불균형하지만 다행히 손가락이 움직인다. 현실에서 나는 노바디nobody이지만 내 글과 그림에선 섬바디somebody가 된다. 일상은 쳇바퀴이지만 마음은 짜릿짜릿하다. 나는 가난하지만 바라는 게 없다. 미래의 대책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 내 삶에 좋은 일을 한다. 좋아하는 일에 빠져 팬데믹을 망각한다. 정희진은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다. 자기 충족적 삶은 최고로 힘을 지닌 상태다. …행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왕 못지않은 최고 권력자 앞에 행복한 새해가 열렸다.










*. 남궁인, 『제법 안온한 날들』

**.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의 야생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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