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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09. 2021

온 세상 케이크를 폭파하고 싶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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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과 생크림이 풍성한 케이크를 나눠 먹은 3년 전의 어느 날, 막내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미칠듯한 가려움 때문이었다. 평소에 미미한 아토피 기질이 있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터진 적은 없었다. 어둠 속의 막내는 가려움으로 환장했다. 피가 나도록 긁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쥐어뜯었고, 밤새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아이의 칼 같은 손톱을 저지하려고 날쌘 토끼 같은 작은 손을 붙잡느라 허둥거렸다. 간지러워하는 부위를 살살 두드려주며 달랬다. 긴 밤이었다. 온 세상 케이크를 다 폭파해버리고 싶었다. 아이에게 케이크를 먹인 나를 혐오했다. 그날 막내가 먹은 케이크 양은 내 손바닥의 반 정도였다.


다음날이 되자마자 냉장고에 남아있던 크림투성이 케이크를 음식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아이 몸은 골고루 처참했는데 특히 얼굴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밤새 우느라 눈두덩도 부었지만 얼굴 전체가 탱탱한 분홍색 공으로 변했다. 거울로 자기 모습을 확인한 막내는 기함했고 변한 얼굴이 마음에 쓰였는지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나도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 다음날도 유치원에 못 가긴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컨디션은 후딱 돌아오지 않았다.


계속 얼굴을 긁은 탓에 막내의 입 가장자리가 터졌고 입술에서는 피가 났다. 입가의  터진 상처는 완전히 낫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30일 내내 밥 먹을 때마다 입을 제대로 벌리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면서 우유로 만든 생크림과 수입 밀가루로 구성된 케이크 시트에게 속으로 육두문자를 날렸다. 이제부터 내 손으로는 아이에게 결코 저따위 것을 먹이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좋지 않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자잘하게 짜증 내던 막내의 몸, 마침내는 불같이 격분한 그 몸에 대한 나의 뒤늦은 응답이었다.


그 당시 나는 몇 달 전부터 현미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 건강 때문에 나만 먹던 그 식단을 식구들의 식탁에 올리기 시작했다. 나와 막내만 따로 먹을 수는 없었다. 큰애와 남편만 일반식을 먹게 하고 막내만 못 먹게 한다면 아이가 박탈감으로 상처받을 것이 뻔했으니까. 막내의 아토피가 불이라면  우유, 계란, 고기, 가공식품, 수입 백밀가루 등은 기름이었다. 그 모든 걸 제거한 식단이 현미채식이었다. 고맙게도 식구들은 파릇파릇한 식사를 감사히 먹어주었다.


한 달간 현미채식을 먹은 막내의 피부는 단단하고 고와졌다. 그게 '이젠 생크림 케이크를 먹어도 좋다'라는 몸의 허락까진 아니었지만.


아이의 피부는 여전히 예민했다. 그러나 막내는 유치원 친구가 나눠 준 과자나 주일학교에서 받은 간식을 먹고 싶어 했다. 친구들이 다 먹는 걸 자기만 못 먹으면 너무 슬퍼했다. 그래서 소량을 덜어 주었는데 먹고 나면 예외 없이 일이십 분 후부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이의 두피는 손톱의 강도에 번번이 패전하여 피를 흘렸다. 

명절날 친척들이 기름진 음식들을 먹을 때도 막내는 따라 먹고 싶어 했다. 한 번은 명절에 친지들과 중식당에 갔다. 볶음밥과 탕수육 몇 개를 먹은 막내는 그날 밤 온몸을 사정없이 긁었다. 얼굴을 뺀 나머지 부분에 아토피가 솟구쳤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가려워서 난리 법석이었다. 살이 벗겨져도 아픈 줄 모르고 긁다 보니 내복은 물론이고 친척 집 이불에까지 피가 묻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남의 집 이불에 묻은 핏자국을 비벼 빨았다. 막내는 긁어서 상처 난 발등이 아파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며 쩔쩔맸다. 

남이 먹는 것은 나도 먹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막내는 남이 먹는 걸 따라 먹을 때마다 피를 봐도 끝나지 않을 가려움을 감당해야 했다. 피부는 추석이나 설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음식을 가려 먹이노라고 친척들에게 양해 아닌 양해를 구했다. 다 같이 막내의 식단에 맞춰서 먹어달라는 무리한 주장 같은 건 한 적도 없다. 그저 막내의 밥그릇에 기름기 많은 고기를 올려 주거나, 수입 밀가루나 유제품이 들어간 간식류를 아이에게 권하지 말아 주십사 하고 꺼낸 얘기였다. 몇몇은 그런가 보다 했지만 몇몇은 그다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비포before 사진과 현미 채식 위주의 식사 이후에 뽀얀 살결로 돌아온 애프터after 사진을 나란히 보여드려도 시큰둥했다. "그래도 고기는 먹어야 건강하지, 못 먹어서 불쌍하네, 딱 하나만 주면 안 되냐? 엄마가 참 나쁘네, 아이스크림 좀 주면 안 돼?"같은 희한한 말들이 쏟아졌다. 거기에 대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스크림 먹이고 싶으시면 먹인 후에 막내랑 같은 방에서 하룻밤 자 보세요."


담배를 피우다가 폐에 문제가 생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진 않는다. "그럴수록 담배를 더 피워서 폐가 적응을 하게 만들어." 술을 마시다가 간에 문제가 생긴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계속 마셔. 그러면 나이 들었을 때쯤이면 술 마셔도 끄떡없는 체질로 바뀔 거야."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다가 비만이 된 사람에게 이렇게 조언하지도 않는다. "햄버거를 꾸준히 먹어서 네 몸이 패스트푸드를 견뎌내게 만들어야지." 

담배, 술, 패스트푸드 때문에 몸이 망가진 사람에게는 당장 그것들을 끊으라고 권하는 게 보편이다. 그러나 우유, 계란, 고기, 가공식품 때문에 건강이 나빠졌다고 하면 그것들을 끊으라는 말 대신 이런 말을 반복해서 듣게 된다 "몸이 왜 그렇게 예민하냐, 아무거나 먹어도 이겨내는 체질이 되어야지, 그런 것도 먹을 줄 알아야 돼, 계속 조금씩 섭취하면서 몸이 적응하게 만들어라, 크면 자연스럽게 낫는다."


특히 우유와 고기를 집에서 안 먹인다고 하면 흡사 아동 학대범 보듯 한다. 우유가 칼슘의 대명사가 된 것과 고기가 단백질의 대명사가 된 것은 그것들을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기획한 장구하고도 견고한 설계이지만 비난받는 건 우유와 고기를 먹으나 안 먹으나 금전적 이익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다. 저런 것들을 안 먹여서 아이의 피부가 개선되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과격하고 유별난 엄마로 취급된다.


칼슘이 중요하다는 걸 나도 안다. 그래서 나는 우유의 아홉 배가 넘는 칼슘이 들어있는 건미역으로 미역국을 자주 끓인다. 막내가 참 좋아하는 김에는 우유의 세 배 이상, 막내의 간식인 아몬드에는 우유의 두 배 이상의 칼슘이 들어 있다.

단백질이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는 세계보건기구가 충분하다고 말한 수치, 섭취한 칼로리 중 단백질은 4.5% 면 된다는 발표를 기억한다. 그것에 따르면 인간은 양배추만 하루 종일 먹어도 필요한 양의 2배가 넘는 단백질을 섭취하게 된다. 그 외에도 시금치에 51%, 버섯에 35%, 콩에 26%, 오트밀에 16%, 통밀 파스타에 15%, 옥수수에 12%, 감자에 11%의 단백질이 들어있다. 존 로빈스는 수많은 논문을 검토한 끝에 결론 내렸다. "쌀밥에다 콩을 약간 섞거나 신선한 야채를 반찬 삼아 먹기만 해도 따로 동물성 식품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단백질은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단백질 필요량이 최고치인 극단의 경우라 하더라도 말이다" *


저런 명백한 수치들이나 연구는 나를 외골수라고 염려하는 이들에게 이상스러울 만큼 위안이 되지 못했다. 적지 않은 공부를 녹여낸 나의 식단은 그저 내 아이를 튼튼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당연히, 그거면 되었다.


막내가 급성 아토피로 악몽 같은 밤을 보내는 일은, 이제 우리 집에선 없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식구들 중 피부가 제일 약하다. 막내는 여름마다 꼭 땀띠가 생기는데 그때마다 가려워서 긁고 피딱지도 생긴다. 겨울에는 피부가 건조해서 종종 긁는다. 하지만 계절을 타느라 겪는 피해들은 중한 아토피로 겪은 고생에 비하면 무겁기가 십 분의 일도 안된다.


손톱 하나가 빠진 적도 있다. 막내가 연필을 쥘 때 눌리던 손가락 부위에 염증이 생겼고 그게 손톱으로까지 번졌다. 후엔 손톱이 완전히 빠지게 됐다. 의외로 이 과정에서 별다른 통증은 없었기에 아이는 덤덤했다. 얼마 후 손톱이 사라진 부위에 얇은 막이 생겼다. 그 막이 점점 단단하게 변하면서 예쁜 새 손톱으로 완성되었다. 막내의 몸은 외부로부터의 치료 없이도 스스로 손톱을 재생산했다. 


최근엔 막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통곡을 했다. "엄마~ 쉬하는 곳이 동그랗게 됐어요!" 확인해보니 음경 끝이 구슬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아이는 벌레가 알을 낳은 게 아니냐며 엉엉 울면서 겁에 질렸다.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이게 뭔지 엄마도 잘은 모르지만 벌레가 알 낳은 건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며 막내를 안심시켰다. 검색을 해보니 명백히 귀두포피염이었고 추천해놓은 연고도 집에 있었다. 잘 씻고 약을 바르니 반나절만에 나았다.


집에서는 음식을 가려먹지만 학교 급식은 편하게 먹도록 놔둔다. 우유 급식은 신청하지 않았지만 점심 급식까지 집에서 싸간 도시락을 홀로 꺼내 먹게 하는 건 아이에게 가혹할 것 같아서 그랬다. 점심 급식엔 유제품이 들어갔거나 기름진 음식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땐 아이 스스로 절제해서 안 먹기도 하고, 그냥 먹기도 한다. 먹은 날은 어김없이 몸을 긁지만 예전보단 확실히 덜하다. 맹렬하던 아토피가 수그러드는 게 보인다.  


앞으로도 막내의 피부에 크고 작은 탈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는 '아토피'라는 단어에 예전만큼 움츠러들지 않는다. 나도 아이의 피부 변화에 한결 느긋해졌다. 하나님께서 막내의 몸에 자연치유력을 주신 것과 맛있게 먹고 건강해질 수 있는 제철 채소, 과일, 통곡물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한다. 자연스럽고 소박한 먹거리로도 독수리처럼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과 증거와 자신감이 내게는 있다.


아이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됐을 때 이유식을 먹였다. 음식에 따라 달라지는 변의 상태가 재밌었다. 브로콜리 이유식을 먹으면 초록색 변을 보고 당근이 들어간 미음을 먹으면 주황색 변을 보았다. 

막내는 케이크를 먹으면 몸을 긁었다. 현미 채식 위주의 식사를 먹으면 종잇장 같은 피부가 점점 강해졌고 회복력도 올라갔다. 몸은 인풋과 아웃풋에서 늘 정직하다.


나는 오늘도 현미쌀을 씻어 안쳤다. 미역을 불리고 김을 잘라 반찬통에 채우고 배추와 무와 당근, 애호박, 팽이버섯, 표고버섯을 썰고 고구마를 찌고 우리 밀 부침가루로 배추전을 부쳤다. 막내를 위한, 우리 가족을 위한 적당한 인풋이었다.








*. 존 로빈스, 『육식의 불편한 진실』


덧붙임: 식구들 생일엔 쌀이나 찹쌀가루가 주원료이며 당 함량이 낮고 크기가 작은 비건 케이크를 사 먹고 있다. 그런 케이크를 먹으면 막내도 몸을 긁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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