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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19. 2021

갑자기 5일간 친정에 다녀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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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조카 J와 아빠가 친정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만 두 살이 된 J는 우리 네 가족을 보자마자 기쁨의 표시로 작은 팔을 참새 날개만큼 빨리 움직였다. 꺄아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헤헤 거리며 한참 웃기도 했다. 그 소리는 봄 햇살을 노래로 치환한 것 같았다. 


J는 우리 아이들과 달리 울음이 짧고 혼자 놀기도 잘 하고 낮잠도 잘 자고 안아달라 거나 업어달라는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고마울 만큼 수월한 아이였다. 그러나 4박 5일 동안 친정에서 J와 지내는 동안 나는 목이 부었고 손목 통증이 생겼다. 그 아이는 많은 대답을 필요로 했고, 거의 모든 일에 당당하게 도움을 요구했다. 수월해도 아가는 아가였다.


70대 언저리인 친정 부모님 댁에 J가 온 지 두 달이 되어간다. J와 함께 사는 새로운 생활에 부모님은 적응 중이셨다. 조금이라도 밥을 더 먹이려는 엄마와, 입에 넣었던 밥을 심심하면 뱉는 J는 식탁에서 씨름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엄마는 때로 뚜껑이 열려서 버럭 야단을 쳤고 J는 엉엉 울며 "엄마 갈래! 엄마 갈래!"라고 말했고 그럼 엄마는 "가라, 가! 신발 신고 너희 집에 가!"라고 다시 버럭 했다. 


엄마는 J가 남긴 밥을 자기 입에 털어 넣기도 했지만 화났을 땐 음식물 쓰레기통에 털어버렸다. "내가 간식을 주나 봐라, 국물도 없다."라며 한숨 쉬다가도 엄마는 몇 분 후에 나를 시켜 딸기를 씻게 했다. 딸기는 J가 그나마 좋아하는 과일이다.

딸기 꼭지를 따는 나에게 엄마는 말했다. "나는 딸기만 보면 화딱지가 나. 네 친할머니가 입원하셨을 때 보호자 침대도 없는 병실에서 나 혼자 밤새 간호했거든. 다음날에 느이 고모가 딸기를 사들고 와선 나한테 고생했다고 하더라. 그 딸기를 씻어서 시어머니 갖다 드렸지. 생전 그런 말 안 하던 네 할머니가 그날따라 '너도 하나 먹어라' 하더라고. 그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느이 고모가 급하게 이러잖아. '야, 야, 너는 먹지 마라! 어머니! 이거 어머니 드시라고 사 온 거란 말이에요.' "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고모는 복받고 참 자알 살겠네." 참고로 나는 이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었고 나의 고모는 딸기를 밭째 사모아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을 대단한 부자이다. 

엄마는 포크로 딸기를 찍으며 외쳤다. "J야! 딸기 먹어 딸기!" 나는 J에게 말했다. "J야 할머니부터 하나 찍어서 갖다 드려."


먹는 양이 너무 적은 J는 변비에 걸렸다. 엉덩이 뒤에 손을 대고 아야, 아야, 아야,를 연발했다. 그런 J를 아기 변기 위에 앉혀 주었더니 콩알 크기의 응가가 나왔다. 그렇게 작은 응가를 본 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변비를 개선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과일이나 채소를 더 먹일라 치면 작은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나는 엄마에게 유산균을 먹여보자고 제안했다. 친정에는 어른용 유산균 제품이 있었는데 그걸 조금만 먹여보자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엄마는 J에게 그걸 한 번에 다 먹였다. 몇 시간 후 J는 목욕을 했다. 깨끗이 씻은 후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서 물놀이 중이던 J가 으아아악 하며 울었다. 엄마가 달려가 보니 J 몸에서 나온 기다랗고 딱딱한 응가가 욕조에 둥둥 떠 있었다. 엄마는 바가지로 똥과 똥물을 퍼서 변기에 버리고 J를 처음부터 다시 씻겼다. 


식탁에서 할머니와 한 판 싸웠고, 며칠 간의 변비를 욕조에서 해결한 J는 그날도 자기 할머니와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꼭 붙어서 정답게 놀던 우리 집 애들이나, 고모인 내가 아무리 감언이설로 꼬셔도 잠은 할머니랑만 자겠단다. 그날 밤 J는 할머니의 볼을 어루만지고 뽀뽀를 하며 "할머니 사랑해~."라고 말하고서 금세 잠들었다.


J의 부모인 오빠와 새언니는 맞벌이 부부이다. 두 사람은 육아휴직과 단축근무를 쓰며 J의 생애 첫 1년 반을 함께 했다. 새언니의 복직과 함께 J의 어린이집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다 코로나가 심해지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는 형편이 되었고 결국 J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으로 왔다. 


오빠 집과 친정은 차로 6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주말마다 아이를 만나러 가기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거리이다. 코로나 때문에 새언니 회사에서 재택근무가 잡힐 때, 주말과 연휴가 붙어서 오빠가 길게 쉴 수 있을 때, 두 사람은 J를 만나러 갈 수 있다. 


새언니가 재택근무를 받아 자기 시댁에 건너갔던 날, J에게 주려고 새언니가 챙긴 간식 중 하나가 엄마의 심기를 건드렸다. 고구마를 가공해서 만든 제품이었고 먹다 남은 것이었는데 지퍼를 열어보니 하얀 곰팡이가 쓸어 있었단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회사가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엄만데 애한테 먹일 걸 확인도 안 하고 들고 오다니. 느이 새언니도 참 정신없지."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곰팡이 확인 못 한 오빠도 정신없긴 마찬가지죠. 밖에서 일하는 것도, 아이 키우는 것도 오빠랑 새언니 둘 다 같이 하는 거잖아요. 둘 다 바빠서 참 힘들겠다." 엄마는 내 말을 듣고 몇 초 후에 다시 말했다. "아아니 그래도 애가 먹을 건 엄마가 좀 챙겨야지." 나는 또 말했다. "늦게라도 곰팡이 생긴 걸 확인했으면 그때라도 버리고 다른 걸 먹이면 되지 뭘. 별일 아닌 것 같은데요?" 또박또박 대답하는 나에게 엄마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화가 끊길 때쯤 나는 애호박이 필요했다. 찌개에 들어갈 재료를 썰던 중이었다. 엄마는 냉장고에 분명히 애호박이 있긴 한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냉장고와 김치냉장고의 문짝 세 개를 두 번씩 여닫고 검은 봉지들을 들춰가며 열심히 뒤졌다. 나오라는 애호박 대신 다른 걸 찾았다. 냉장고 서랍 구석에서 곰팡이가 잔뜩 낀 보라색 채소, 가지였다. 나는 엄마에게 가지의 상태를 알렸다. 엄마는 "아이고 버려야겠네." 말하며 허둥지둥 가지를 처분했다. 채소 소비가 빠른 우리 집 냉장고에서도 곰팡이 코트를 두르는 식재료는 종종 나온다. 엄마나 새언니나 나나, 아빠나 오빠나 내 남편이나, 우리 모두는 사느라 정신이 없이 바쁘고 힘들다. 


아빠는 당신의 집으로 이주한 막내 손주에게 다정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J는 이상하게도 할아버지를 괄시했다. 함께 먹으려고 접시에 담은 과일임에도 할아버지가 집어먹기라도 하면 울면서 화를 냈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 "아니야! 아니야!"라며 맞섰고, 할머니랑 같이 자는 방에 할아버지가 문을 빼꼼 열고 쳐다보면 "할아버지 빨리 나가요, 할아버지 방에 가세요"라고 쫓아냈다. 할아버지에겐 기저귀를 가는 일이나 목욕도  못 거들게 했다. 그러다 드디어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할아버지 컴퓨터에서만 뽀로로를 볼 수 있다는 거짓말에 J가 속아넘어간 것이다. 이제 아빠는 막내 손주를 20분 연속으로 무릎에 앉힐 수 있다. 엄마는 "과연 뽀통령"이라며 감탄했다. 

한편 J는 자기 할아버지가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올 때 팔짝팔짝 뛰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강아지처럼 반긴다. 아빠는 J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헷갈린다.


어쨌든 J는 여전히 자기 할아버지보단 할머니를 선호한다. 아빠는 할머니만 찾는 손주 앞에서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눈치인데다 오랜 세월 동안 자녀 돌봄에서 비주체적으로 살아온 관성도 있었기에 스스로를 자신의 방에 고립시키거나 혹은 고립되었다. 방에서 두문불출 유튜브를 보는 아빠를, 엄마는 못마땅해 했다. 특히 J에게 밥을 먹일 때 그러했다. 밥알 몇 톨을 입에 물고 씹을 생각을 않는 손주 앞에서 "내 자식이었다면 벌써 두드려 팼을 텐데"라고 주먹을 부르르 떨던 엄마는 "너희 아빠는 애 보는 일에 도통 관심이 없어."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엄마는 곧 벌떡 일어나더니 아빠 방 문을 확 열어젖히며 "뭐 하는데요? 가서 애 밥 좀 먹이세요! 애는 나만 봅니까?!"라고 화를 냈다. 


엄마는 아빠와의 공동육아를 갈구하면서도 오빠가 단축근무로 J를 돌본다고 할 땐 못마땅해했다. "느이 오빠가 돈을 팍팍 잘 벌면 J 엄마가 집에서 애를 볼 수 있을 텐데."라며 오빠를 한심하게 여겼다.

엄마의 저 말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공허했다. 수도권에 사는 대부분의 젊은 부부가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사회이며, 맞벌이든 외벌이든 아이는 부부가 함께 키워야 하고, 오빠가 돈을 얼마나 버느냐에 상관없이 새언니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직장 생활 유무를 결정할 자유가 있으며, 여성에게 몰리는 돌봄 의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면서도 다른 여성에게 그 삶을 대물림하려는 것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J에게 밥 좀 먹이라는 엄마의 호통에 아빠는 쭈뼛쭈뼛 방에서 나왔다. 아빠는 나 보기 민망한지 "너희 엄마가 J 보느라 고생이 많아."라고 했다. 나와 아빠는 마주 앉아 J에게 밥을 먹였다. 아빠는 밥 한술에 멸치 두 개를 꽂아서 로켓을 만들었다. J는 웃으며 받아먹었는데 그걸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 내 머리카락이 1센티미터 자랐다. 밥을 몇 숟가락 먹이던 아빠는  "아이고 지겨워서 못하겠다."라며 일어났다. 결국 식탁엔 J와 나만 남았다. 마침내 J의 식기를 설거지하는 나는 라푼젤이 되어 있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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