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손톱(네일 보디 부분)이 너무 짧아서 손톱 깎아주기가 정말 힘들어. 손 모델은 못할 손톱이야. 손톱 모양이 너어무 이상해. 근데 알고 보니 며느리 손이 저렇더라고?" 아빠의 말이었다. 엄마는 저 말에 대고 버럭 화를 냈다. "아이고 참! 그만 좀 하세요! 아니 저 손톱 타령을 며느리 앞에서 자꾸 하잖아. 며느리가 저 말 듣더니 민망해하면서 '제 손이 그래요…'라는 거 있지. 내가 다 민망해서, 어휴. 네 아빠 왜 저러나 몰라!" 나도 아빠에게 한 마디 했다. "손톱 모양이 어떻든 다 하나님이 만드신 건데 왜 그러셔요." 교회 장로인 아빠는 내 말에 아무 대꾸를 못했다.
손주의 손톱 모양을 지적하는 아빠의 말에 불편해한 엄마는 한편 나의 피부를 지적했다. 엄마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뭐가 그렇게 돋았냐, 얼굴이 왜 그렇게 더럽냐, 여자가 관리를 해야지, 왜 아무것도 안 바르냐, 그러면 안 된다. 이거라도 바르라며 엄마가 갖다 준 로션을 끝내 바르지 않는 것으로 나는 엄마의 모순에 조용히 대항했다.
J는 나와 우리 집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우리 애들도 J가 귀여웠는지 셋이서 뭉쳐서 잘 놀았다. 며칠 지나자 우리 집 애들은 슬슬 지쳤다. "언니, 같이 놀자. 오빠, 같이 놀자."라고 쉴 새 없이 말하는 사촌이 피곤해진 것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J의 눈을 피해 요리조리 숨기 시작했다. J는 "언니 어디 갔지? 오빠 어디 갔지?"라며 집을 뒤졌다. J에게 발각된 아이들은 작은 손에 잡혀서 질질 끌려 나왔다.
J가 낮잠을 잘 때 아빠는 우리 아이들에게 외출을 제안했다. 집에 있는 게 더 좋은 큰애는 남았고 둘째와 나만 아빠를 따라나섰다. 근처 서점으로 갔는데 서점이 속한 건물 전체에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입구에 '전체 폐점'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은 채. 서점이 사라졌다는 것도 건물 전체가 다 망했다는 것도 모두 안타까웠다. 그런 건물은 맞은편에 한 채 더 있었다. 색이 바래고 찢어진 간판을 너덜너덜 달고 있는 빌딩이었다. 저기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아빠의 주도 아래 다이소로 갔다. 둘째는 2층 완구 코너에서 10분 넘도록 물건을 들었다 놨는데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했다. 밖으로 나온 둘째는 "나만 장난감을 사면 다른 애들은 장난감을 못 받잖아요."라며 울었다. 미안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나왔나 보다. 원하는 게 있으면 사도 된다고 말해주었지만 둘째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울음을 그친 둘째에게 아빠가 말했다. "슬플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울면 안 돼요. 성경에 바울 사도가 나오는데 그분은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셨거든." 나는 아빠에게 벙찐 얼굴로 말했다. "예수님은 슬플 때 눈물 흘리셨는데요."
아빠는 작은아빠가 태어났을 때 받은 설움을 여러 번 이야기하셨다. 아빠가 태어났을 땐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작은아빠가 태어나자 살림이 피었다고 한다. 아빠에겐 장난감이라곤 없었지만 작은아빠는 무려 세 발 자전거를 몰았다. 너무 부러웠던 아빠는 그걸 타보려다, 다 큰 애가 왜 동생 물건에 손을 대냐며 할머니께 벼락을 맞았다. "아이고 그때 얼마나 섭섭하던지." 했던 얘기 또 하는 아빠 앞에서 나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반응한다. "아빠 섭섭했겠네요. 그거 좀 타본다고 닳을 것도 아닌데."
그보다 더 자주 듣는 이야기는 아빠의 네 살 적 일화이다. 어느 날 친할머니는 지인 장례식에 가느라 친척 집에 아빠를 맡겼다. "여기 좀 있어."라는 친할머니의 말만 듣고 아빠는 그곳에 남겨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네 살짜리 아이는 언제 올지 모르는 어머니를 울면서 기다렸다. "아이고 그때 얼마나 무섭던지. 엄마가 나를 버린 건가 싶어 걱정이 되잖아. 네 할머니가 돌아왔을 때 너무 반가워서 막 울면서 뛰어갔다."
옛날 아이든 요즘 아이든, 아이들은 재채기 같은 자기감정을 숨길 재주가 없다.
친정 나들이가 끝나갈 무렵 J에게 이별이 다가옴을 서서히 알렸다. 그때마다 J는 다급한 표정으로 "조금 놀다가 가. 조금 놀다가 가."라고 말했다. 마침내 집에 돌아가는 시간, 외투를 입고 마스크를 낀 채 작별 인사를 하는데도 J는 계속 "조금 놀다가 가. 조금 놀다가 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얼른 고를 수 없었다. 겨우 헤어지는 우리를 향해 J는 배꼽인사를 하며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말했다. 시무룩하게.
이번 친정 방문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병원에서 24시간 심전 검사 장치를 달고 온 아빠의 사진과, 우리 집 애들을 못 봐서 몸이 아픈 것 같다는 아빠의 말에 후딱 짐을 싸서 몇 시간 거리를 달려간 즉석 외출이었다. 닳은 몸을 입고 아가를 돌보는 부모님을 뵙고 왔다. 새 모이만큼 밥을 먹고도 누구보다 기운이 넘치는 조카를 만나고 왔다. 지친 부모님을 위해 거들 수 있는 작은 일을 도와드렸지만 동의할 수 없는 말 앞에서는 네 네 거리지 못했다. 조카가 너무 예뻤지만 '더 이상의 출산은 없다'라고 이미 했던 다짐을 또 떠올리기도 했다.
친정에서 틈날 때 김기석 목사님의 『청년 편지』와, 장강명 소설가의 『산 자들』을 읽었다.
『산 자들』은 한국 사회가 겪는 노동과 경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아픔이 나열된 작품이었다. 자영업, 해고, 재건축 등에 얽힌 이야기들은 전쟁과 다를 바 없었다. 책을 읽으며 건물 통째로 폐점된 아까의 그 빌딩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의 말에서처럼 그 아픔들을 '단순히 전시'하기보다 공감과 이해의 시선으로 써 내려갔다. 이야기 속의 한 인물은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형님, 저희도 같이 좀 살면 안 됩니까?"
『청년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인간의 인간 됨은 '살려 달라'라고 외치는 이들의 부름에 응답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 가족 안에도 자잘한 부조리와 아이러니가 있다. 나는 그것들을 좋아하지도, 그것들에게 진저리를 치지도 않는다. 가족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빚어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자녀와 손주에게 베풀고 있는 덜그럭거리는 사랑은, 당신들이 받았던 것에 비하면 수 배나 더 크고 세련된 것이다. 나와 남편, 오빠와 새언니, 우리 아이들과 J도 다들 덜그럭 거리는 인생이다. 모두 한계가 많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서로 어루만지며 서로에게 응답하며 산다. 같이 좀 살아보려고.
집에 돌아와 가족 밴드에 들어가서 J의 사진을 보았다. 2년을 갓 넘긴 생명 속에 희로애락이 많이도 들어차 있었다. 사진을 보며 며칠간의 J를 추억했다.
의연하다가도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우는 J. 자기 고모부가 먼저 돌아간다며 통곡하던 J. 남편이 아이들과 나를 데리러 와 주었을 때 상모 돌리듯 머리를 흔들며 토끼처럼 뛰어다닌 J. 사촌 오빠와 색칠 놀이를 하고, 사촌 언니와 공놀이를 하면서 할머니가 처음 듣는 웃음을 터뜨린 J. 부모와 매일 밤 영상통화로 만나는 J. 사이렌 소리를 무서워하는 J. 가습기가 뿜는 수증기에 머리 감는 시늉을 하던 J. 인형들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인형들이 깨지 않도록 속삭이던 J. 새들에게 까르르 웃으며 돌진하던 J. 깔아놓은 이불이 비뚤어질 만큼 침대 위에서 뛰던 J. 밥을 안 먹겠다며, 뽀로로를 더 보겠다며 사자 소리로 떼쓰던 J.
13kg 밖에 안 되는 작은 J가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