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수정하느라 몇 주를 보냈다. 그럭저럭 괜찮다며 마침표를 찍었던 그림들이었는데 다시 보니 가관이었다. 수선을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이 정도의 그림에 만족했던 과거의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만 이런 건지도 모르지만 그림을 그리다 보면 딱하게도 내 그림에 도취되곤 한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형태와 색을 채워나가는 일이라는 게 그렇다. 얼이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눈 덮인 들판을 몇 초 만에 봄으로 만들 수 있고, 거대한 나무를 타임 슬립 하듯 순식간에 자라나게 할 수 있고, 산과 태양도 가뿐하게 옮길 수 있는 그림 그리기. 이것이 내겐 탄산음료보다 짜릿하고 떡볶이보다 군침 돈다. 이런 즐거움에 반해버리면 내 그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27년째 그림을 그려왔는데도 여전히 그렇다. 내 손의 부족함에 관대해지고 나의 너그러운 시선에 속아 버린다.
그러나 내 삶을 거쳐 간 여러 ‘그림 감정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내가 그림을 그리며 얼마나 들떴고 또한 쩔쩔맸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림 그릴 시간을 짜내기 위해 끼니를 거르고 밤을 새운 것도 몰랐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고심하느라 빠진 나의 머리카락 개수나, 그림 한 장을 건지기 위해 낭비한 종잇장 수에도 무관심했다. 그들은 결과로서의 내 그림만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뿐이었다. “불합격”이라고.
산뜻하게 통보되는 저 세 글자는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요 몇 년 사이엔 64번의 불합격을 기록했다. 내가 슈퍼 오뚝이는 아니다. 밀도 높은 실패에 마음이 탈탈 털렸다. 낙방을 연타로 얻어맞으면서도 어쩔 도리 없이 계속 그린 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고, 내가 가진 유일한 기술에 기름칠을 하기 위해서였고, 무엇보다 그 대책 없는 쾌락 때문이었다. 나에게 그림은 내가 부리는 허술한 도구이며 기쁨이자 고통이다.
S 선생님은 나에게 그림의 고통을 알려주신 대표적인 ‘그림 감정사’이다. S 선생님은 첫 수업 때 이렇게 말문을 여셨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고시 공부하듯 그림을 그리게 될 겁니다.” S 선생님의 예언대로 학생들은 고난도의 과제를 엄청난 양으로 뽑아내야 했다.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그려간 그림은 S 선생님의 가차 없는 판정을 듣고 너덜너덜해졌다. 공개 품평 시간은 거의 공개 처형 시간이었다. 빡빡한 수업과 지나친 과제, 가혹한 평가 때문에 S 선생님과 갈등을 빚는 학생이 생겼다. 수업을 포기하고 관두는 수강생도 나왔다. 그러나 나는 버텼다. 기어이 내 그림은 S 선생님의 떨떠름한 인정을 받고 졸업 전시회에 걸렸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S 선생님의 후려치는 리더십보다 다른 사건의 영향이 컸다.
S 선생님의 수업 중 한 학생이 울면서 고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선생님, 전 그림 그리는 게 좋긴 한데 재능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났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S 선생님 앞에서 저런 한탄이 발화된 것이 당혹스러웠다. 나도 저 학생과 똑같은 딜레마를 가졌기에 서럽기도 했다. 우리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S 선생님의 입을 쳐다봤다. ‘노력’이라는 단어나 ‘나약하다’라는 질책이 나올 차례였다. 드디어 S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것도 재능이다.”
S 선생님의 어록에 기록된 단 하나의 문장, 저 문장의 위력이 나와 동기생들의 멱살을 잡고 졸업 전시회까지 끌고 갔다. 졸업 후에야 S 선생님이 순한 맛이었음을 알게 됐다. 사회는 나에게 학교 보다 수십 배 많은 불합격을 통보했다. S 선생님과는 다르게 어떤 점이 모자란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불 맛 나는 불친절한 세상에서 나는 예전의 그 학생처럼 때론 운다. 울더라도 매일 조금씩 그린다. 덜 된 그림을 다 되었다고 착각하는 나의 실력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내가 그린 그림들 중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은 단 한 장도 없다. 그저 나에게도 재능이 있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해 주신 S 선생님의 말을, 연필 쥐듯 꼭 쥐고 산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그리면서 산다.*
*. 이자크 디네센의 말,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써라."의 오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