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 그리는 프리랜서다. 내가 그린 그림을 내가 홍보하고 내가 판매하는 일을 오랫동안 했다. 그림의 종류는 다양했다. 일러스트, 만화, 포스터, 디자인, 영상….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sns에 부지런히 쌓인 내 그림은 지인들과 낯선 이들에게 서서히 알려졌다. 낯선 사람들은 내 그림이 좋으면 샀고 그렇지 않으면 지나갔다. 낯선 이와 일을 할 땐 계약서를 쓰고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그림의 근사치를 최대한 근사하게 그려주었다. 그들은 흡족해했고 나는 뿌듯했다. 사회적 약속 안에서 일은 안전하게 진행되다 깔끔하게 끝났다.
그런데 지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B는 나에게 6장의 그림을 부탁했다. 부담 없이 간단하고 쉽게 그려주면 된다고 했다. 물론 보수를 초월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B가 주문한 그림 사이즈는 쓰임새에 비해 좀 컸다. 정확히 하기 위해 나는 사이즈를 재차 물었고, B는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B를 갓 알게 된 때였다. 남편은, B는 요구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니, 해달라고 대로 다 해주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나에겐 화통한 B의 첫 부탁을 물리칠 명분이 없었다. 간단하고 쉬운 그림을 완성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순수와 정성이 들어간 그림을 들고 남편과 함께 B의 집에 내 그림을 배달하러 갔다. 그는 내 그림을 보곤 "어? 이 사이즈가 아닌데?"라고 했다. 그 말 듣는 즉시 내 몸은 괴상해졌다. 얼굴은 마구 화끈거리는데 몸은 얼어붙는 것이다. 그는 난감하기도 쾌활하기도 한 뉘앙스로 "난 요만하게 그려달라고 한 건데?"라며 손가락으로 아담한 네모를 공중에 연신 그려댔다. 이래서 계약서와 메일이 필요한 거다. 구두로 오가는 요구의 휘발성이 나는 죽을 만큼 밉고 싫다. 어쩔 줄 모르는 나 대신 남편이 말했다. "제 아내에게 이제 이런 부탁하지 마세요." 남편에게 손목을 잡혀 B의 집에서 나왔다. 집으로 가는 내내 속상하고 미안하고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그냥 내가 바보 같았다.
J는 술에 취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곳의 지명을 대며 그곳을 그려달라고 버릇처럼 부탁했다. 똑 부러지게 거절할 수도, 뚝딱 그려줄 수도 없는 난감한 부탁이었다. 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앉은자리에서 가시가 돋았다. 수년 뒤 그는 알코올 중독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보고 싶어 했던 그곳, 그려 달라고 졸랐던 그곳을 나는 소리 내어 발음하기 어렵다.
내 그림을 '좋은 일'에 재능 기부해야 할 상황은 골목에 들어찬 카페처럼 흔하게 찾아왔다. 재능 기부의 동기가 내 마음 100% 일 때도 많았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시작부터 끝까지 보람으로 충만했다. 타의 80%, 자의 20%의 재능 제공 상황일 때는 달랐다. 그 일에 대한 공감이나 마음의 준비 없이 '좋은 일'에 떠밀리면 내 맘은 좋지 않았다. 나나 내 그림이 언제든 아무렇게나 가져다 쓸 수 있는 도구 취급받는 것 같았다. 적극적이고 권위적인 내 주변 지인에 의해 나는 종종 그런 식으로 동원되었다.
M은 처음과 끝이 달랐다. 처음엔 자신이 먼저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보수도 주겠다고 했다. 나에게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어서 내가 먼저 비용 이야기를 꺼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M 쪽에서 계약서라는 단어를 언급해 준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몇 달간 일이 진행되면서 계약서와 비용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더 수정해달라, 몇 컷만 더 그려달라는 이야기만이 장마철 비처럼 이어졌다. 낯선 사람과 진행했다면 백만 원 넘는 비용으로 계약했을 일이었다. M은 완성된 내 그림을 쥐고 조용히 퇴장했다. 일 끝난 지 2년이 흘렀지만 M은 단 한 번의 연락이 없다. 내가 언제나 이렇게까지 바보 같은 것은 아니다. 업체와 일할 땐 밥그릇을 편안하게 챙긴다. 비용 면에서 꾸물거린다 싶으면 내가 먼저 연락하고 요구한다. 그런 마땅한 요구를 하는 것이 '어떤 지인'과 얽혔을 경우엔 오일러 공식 증명보다 더 어려웠다.
L은 내가 외롭던 시절 언니처럼 따르던 분이었다. 어느 날 L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L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기뻤다. 내게 있는 최선의 사랑과 실력으로 가르쳤다. 손수 만든 간식도 매번 제공했다. 아이들의 수업 모습을 사진 찍어 L에게 보냈다. 수업 내용과 아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일이 적어드렸다. 비용은 내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재료비조차 내가 충당했다. 내 조카들을 가르치는 것과 일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배신감은 컸다. L의 가족 중 한 명인 F가 내 남편을 몹시 괴롭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내 남편의 사람됨을 안다. F가 남편을 고발하겠다고까지 말했다는 걸 듣자 마음이 파쇄기에 갈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 일은 고발 근처도 가지 않고 끝났다. 고발의 ㄱ에 미칠만한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이다. L은 자신의 가족이 내 남편을 괴롭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이상하리만큼 자주 물었었다. "자기 남편은 본인 이야기 많이 하는 스타일이야? 자기랑 고민 이야기 같은 거 안 해? 요즘 무슨 일 없대? 우리 F는 나한테 온갖 이야기 다 하는데~" 미련 곰탱이인 나는 그게 별 의미 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남편은 내가 L과 가깝게 지내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L의 자녀를 가르치는 것도 알았다.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자신의 괴로움과 나의 기쁨은 별개라고 생각한 것이다. 남편은 자기의 수모가 다 끝난 후에야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혼자 시달렸을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내가 남편의 괴로움을 알았다면 속도 없이 L의 자녀들까지 떠맡진 않았을 텐데. L은 괴롭힘이 진행 중이던 바로 그때에 자기 아이들을 내게 부탁했다. 내가 남편의 고충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임을 알고, 안심하며 계속 아이들을 맡겼다. 공짜로. 나의 정에 기대어서. 나와 그녀는 하나같이 속이 없다.
N은 확성기였다. 나를 세워 놓곤 아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전에 그린 만화에 대해 떠벌렸다. 자기소개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상식을 N은 몰랐나 보다. 심지어 그는 나와 내 만화를 '정확하게' 소개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이에겐 감정과 생각 따위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녀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품평하는 야만적인 부모처럼 행동했다. 어색한 모임 가운데 쏟아진 그의 말에 내 몸은 얼얼해졌다. 무례하고 부주의한 그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H는 그 자리에서 내 만화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H가 나에게 말했다. "왜 만화 같은 걸 그렸어요? 우리 집 애가 학교 다닐 때 하도 만화를 봐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니 그래서, 지금도 만화 그리는 거예요?" 나는 당시에 만화 그리는 일을 관둔 상태였다. H의 자녀가 봤다는 만화는 당연히 내가 그린 것도 아니었다. 그와 나는 만난 지 몇 번 되지 않은 어색한 사이였다. 나는 H가 어려웠는데 H는 나에게 어쩜 그리도 거침없었을까.
보수적인 중년의 H에게 나는 대답했다.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멍청하게, 죄인처럼. "아니오. 지금은 안 그립니다." 그는 안도하며 말했다. "그렇지? 이젠 안 그리죠? 만화 같은 거 그리지 마세요~ 하하하." 만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내가 그린 만화는 전체관람가였다.
이런 일이 셀 수 없다.
그들 모두의 이니셜을 나열하자면 알파벳 26개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나는 어쩌자고 번듯한 미술 선생님도, 디자인 회사의 직원도, 등단한 화가 아무개도 아닌 걸까. 내 그림은 예술이 아니다. 멀쩡한 상품도 아니다. 내 일에는 최저시급도 없다.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섬처럼 뚝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프리랜서 재택 그림 노동자이다. 요조와 신경선의 책을 읽던 중 '언프리 프리랜서 unfree freelancer'라는 대목에서 한숨 쉬며 공감했다.
나는 프리하지 않았다. 살림과 육아를 하고 남는 쥐똥만큼의 시간과, 잠을 포기한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렸다'라는 말엔 일감을 찾아 헤매고, 내 그림을 홍보하고, 계약서를 쓰고, 포장하고, 택배 보내고, 세금신고를 하고, 영수증을 노트에 붙이고, 판매 사이트를 관리하는 게 모두 포함된다. 문자 그대로 '그림을 그린' 시간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코피 흘리며 그렸다. 앓으면서 그렸다. 한 발짝 전진하는 게 고시만큼 어려웠다. 현실의 이런 번잡스러운 모습까지 내 sns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곳엔 주로 멀끔한 그림 결과물을 홍보 목적으로 게시했다. 가끔 내 근황을 업로드할 땐 봐줄 만한 순간을 골라 올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보며 '쟤는 집에서 여유롭게 그림 그리며 편하게 사네'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쟤는 직장에 매여있지 않으니 내가 필요한 그림 한 장쯤 쉽게 그려주겠지'라고 부담 없이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나는 흔쾌히 기부되어야 마땅한 재능을 가진 프리한 사람이었으리라.
무보수를 약속하는 부탁들은 매달 찾아오는 돌아버릴 것 같은 생리처럼 반복됐다. 계약서를 쓸 수 있는 안전한 일은 여름에 내리는 눈처럼 희귀하게 찾아왔다.
제이다 키스라는 레퍼는 이런 가사를 적었다. "리스펙트가 먼저고, 돈 얘기는 그다음이야. 기본이지." 맞는 말이다. 가치를 알아봐 주는 게 먼저다. 그리고 돈 얘기는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다음'이다. 신경선은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책에서 이렇게 썼다. "페이는 그냥 '상대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다'라고 못 박고 시작해야 프리랜서로서 돈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것 같아." 낯선 사람들과의 일, 업체를 끼고 한 일에선 나도 그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지인, 나, 그림의 삼각관계에 들어가면 내 가치가 희한하게 희박해지는 게 문제였지만.
가치를 듬뿍 인정받지 못하는 내 그림을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눈으로 멍하게 바라본다. 불쌍한 그림을 무능한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그림 그리며 살았던 모든 순간이 갑질 당하는 을 같았노라고 징징거리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순간들도 또렷하게 있었다. 그러나 이 길이 대체로 진흙길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내 실력은 미숙했고, 시간은 빠듯했고, 내 그림의 가치를 몰라주는 주변인들이 있었고, 나는 내 그림을 보호하지 못했다. 내 그림이 안전하고 정확한 존중을 받지 못할 때 연필을 쥔 손에서 눈물이 났다.
이것이 내가 그림을 멈추고 인터넷 부업에 손댄 이유이다. 그것은 알록달록한 그림과 반대쪽에 놓인 삭막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타자를 두드린 수고는 쩨쩨할 만큼 정확한 수치로 변환되어 돌아왔다. 맞지 않는 옷을 1년이나 입고 있을 만큼은 편안한 일이었다.
인터넷 부업과 작별한 뒤 도전한 일이 이모티콘 제작이다. 홍보와 판매는 해당 플랫폼이 알아서 다 해주었기에 그림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가히 획기적인 장점이었다. sns에 내 그림을 셀프로 홍보할 땐 해시태그를 타고 온 나의 어색한 지인들이 내 그림과 나를 들여다보곤 했다. 이모티콘 작업을 시작한 동시에 그 불편한 상황에서 해방됐다. 내 이모티콘은 계약서 안에서 안전했다. 매출의 2/3를 떼어가는 통 큰 수수료에 일말의 불만도 없었다. 1/3 분량으로도 손색없는 리스펙트이자 납득할만한 노동의 대가로는 충분했다. 정확한 날짜에 입금되는 것은 기본이었다. 사람들의 대화를 조금 더 재미있고 화사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점도 기뻤다. 보람과 의미를 느꼈다. 매번 백대 일에 가까운 경쟁을 뚫어야 한다는 점이 유일하며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피 말리는 경쟁 속에서 2년 3개월 동안 일했다. 러시아에 내리는 눈처럼 지겹게 고배를 마시다 얼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살기 위해 그림 에세이의 나라로 피신했다.
내가 지금 생산하고 있는 것들은 단 1원도 벌어들이지 못한다. 에세이를 적고 그 글과 어울리는 그림을 그린다. 책을 읽고 사유에 잠긴다. 온갖 집안일을 한다. 전부 다 코스닥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하는 생산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은유 작가는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화폐 생산능력'이다. 돈을 못 벌면 사람 구실 못 한다고 비난한다." 돈으로 측정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곧 잉여인간이 되는 건 아니다. 화폐 생산 능력으로만 나를 판단하려는 악습을 거부한다.
동시에 내 그림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 내 그림에 화폐 가치를 똑바로 부여하지도 않는 사람 역시 거부한다. "돈은 못 주지만 진짜 간단하게 몇 컷만 그려주면 돼", "비용은 적지만 이 일 진짜 의미 있는 일이거든", "우리 단체가 지금 형편이 안 좋아서~"라고 말하는 그들에겐 내게 줄 돈이 아니라 리스펙트가 모자라다. 많이 늦었지만 나는 거절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자라는 중이다.
나의 화폐 생산 능력이 언젠가는 자랄는지 모르겠다. 나는 실력 향상에 집중하기 어려운, 정으로 둔갑한 갈취 시도에 여전히 노출된, 높은 경쟁률 틈바구니에 지친, 아직도 진로를 고민하는 주부 프리랜서 재택 그림 노동자의 흔한 표본이다. 진로도 감을 못 잡고 있는데 돈 같은 건 에라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오늘 내가 뭘 해야 하는지이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시면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라고 말씀하셨다. 장래 일을 걱정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의 고통으로 족하다"라고도 하셨다. 그래서 오늘만큼만 산다. 앞 일에 대비하지 않는 대책없는 사람이 되려는 건 아니다. 지금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나의 노후 대책일 뿐이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다. 돈 돈 거리지 말고, 호구도 되지 말되, 그래도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자고 생각했다. 밥을 두 번 차리고 빨래도 두 번, 설거지는 세 번 했다. 친정 엄마의 전화를 받고 맞장구를 쳐 드렸다. 면 생리대 네 장을 손빨래했다. 아이들 공부를 봐주었다. 성경을 읽었다. 글을 퇴고했다. 그림도 그리고 싶었지만 오늘은 시간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사랑을 받았고 나도 그들에게 그것을 주었다. 1원도 벌지 못한, 가치 있고 생산적인 하루였다.
* 개역개정, NIV 마 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