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의 엉터리 같은 잡담입니다.

by 녹차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의 엉터리 같은 잡담입니다.jpg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의 엉터리 같은 잡담입니다."


남편에게서 온 카톡은 저렇게 시작되었다. 공모전에 내려고 쓴 글을 비평해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는데 그에 대한 응답이 온 것이다. 박 터트리기 게임에서 콩 주머니의 일격에 박의 입이 터지고, 그 안에서 주르륵 떨어지는 기다란 혀 같은 현수막처럼, 저 첫 문장 아래로 장황한 논평이 이어졌다. 엄지로 휙 훑어본 것만으로도 꼼꼼한 분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양과 질 모두에서 품을 들인 글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첫 문장이 준 충격 때문에 내 의식은 마비되었으므로.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의 엉터리 같은 잡담입니다."


저 문장은 내 글에 대한 한 줄 평인듯했다. 내 글이 얼마나 거지 같았으면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결과부터 못 박고 들어가는 걸까. 우매한 자의 현주소를 깨우쳐줘야 한다는 절박함을 견딜 수 없었으려나. 참혹한 수준의 글을 다른 이에게 스스럼없이 내 보이며 비평해달라는 나의 맹랑함에 남편은 기함한 건가. 이제부터 쓴소리를 쏟아낼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귀띔이었을까. 저 문장은 한 글자 한 글자가 온통 매웠다. 내 얼굴은 고추보다 붉어졌다.


숨 쉬듯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맞으면 아프긴 해도 당황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드라운 양 같던 사람에게 갑자기 어퍼컷을 맞으면 아픈 건 부수적인 문제가 된다. 통증이나 야속함보다 더 무시무시한 혼란을 감각하게 된다.


남편과 나는 안정적인 두 천체였다. 빛의 중력에 이끌려 사랑과 예의의 궤적으로 나란히 공전 중이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돌연 궤도를 이탈했다. 수억 년을 지속해 온 우직한 레이스가 예고도 없이 흐트러진 것이다. 자연법칙이 깨졌다. 공포스러운 카오스였다. 남편은 나에게 저런 식으로 말할 사람이 명백하게 아니었다. 숨 쉬듯 실패하는 나에게 4월 햇살 같은 위로를 베푸는 사람이었다. 걸음마 같던 나의 초기 에세이를 읽고서 '글을 왜 이렇게 잘 써요?'라는 객관적이지 못한 갈채를 민망하게도 들려준 그였다. 그랬던 남편과 저 첫 문장은 아무리 애써봐도 겹쳐지지가 않았다.


마침내 난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비평은 남편이 쓴 게 아닐 거야. 남편이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크리틱을 받았나 봐. 아마 글의 끝부분에 그런 사실을 밝혀놓았을 테지.' 나는 빼곡한 글자들을 휙휙 밀어 비평의 마지막을 확인했다. 다른 이가 써줬다는 언급은 없었다. 내 사리분별력은 고장 났다.


저 한 줄의 혹평에 몇 분간 정신을 못 차렸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몸을 돌려 창문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고였다. 내가 이 정도로 형편없나? 그렇긴 하지. 내 글은 보잘것없어. 최근 두 번의 공모전에서 다 떨어졌잖아. 그런데 남편은 난데없이 왜 거칠어졌을까.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고 마음은 진정이 안 되었다. 하지만 진도를 빼야 했다. 촘촘하고 긴 비평 중 겨우 한 문장을 읽었을 뿐이었다. 벙벙한 마음을 추스르며 코멘트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당장 두 번째 문장부터 남편의 시선과 말투가 드러났다. 정확하지만 정중했다. 차분하고 익숙한 그 목소리였다. 내가 볼 수 없었던 부분을 차근차근, 그러나 조심스럽게 짚어주는 고마운 글이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이 비평글의 첫 문장에 주어가 없다는 것을.


저 첫 문장의 임자는 내 글이 아니라 남편의 글임을 가까스로 눈치챘다. 남편은, 내 글에 대한 지적을 읽는 내가 혹여 낙담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평의 문을 다음과 같이 열었다. "(이 비평글은)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의 엉터리 같은 잡담입니다." -그러니, 지적한 부분이 다소 많다고 해서 풀 죽을 필요 없어요. 도움이 되고 싶어서 꼼꼼히 적었을 뿐이에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남편의 마음을 뒤늦게 읽었다.

정성껏 적은 논평을 스스로 깎아내려서라도 남편은 나를 안심시키고 싶었나 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는 정감 없는 평판을 덮어씌웠다. 미안했다. 차마 감동할 수는 없었다.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에서 주어에 대한 설명을 읽은 적이 있다. 문장에서 주어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거나 생략함으로 얻게 되는 뉘앙스를 다룬 내용이었다. 남편의 첫 문장은 윤태영의 설명을 피부로 와닿게 했다. 서술에 대응하는 주어가 생략되었을 때, 독자는 주어를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화자의 의도와 반대되는 주체를 빈 괄호에 채워 버렸다. "(당신의 글은)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의 엉터리 같은 잡담입니다."라고. 명확하게 지목되지 않은 주어는 화자와 독자의 입장에 간극을 만들 위험이 있다. 서술이 강력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첫 서술을 보자마자 내 글을 떠올린 건, 나의 무의식 탓도 크다. 내 글이 허섭스레기라는 자괴감은 혈관을 타고 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한 문장 쓰고 헤헤거렸다가, 다른 문장을 쓰고 나면 못마땅하여 몸을 비튼다. 이런 작문 조울증을 극복하고자 좌우명으로 붙잡은 문장이 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써라." 이자크 디네센의 저 말이 나의 태도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이번 일로 뽀록났듯이 나는 처참히 실패했다. 내 글에 절망하느라 내 얼굴의 살가죽은 자주 구겨진다.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전전 긍긍한다. 내 글이 글로서 독자에게 봉사할 수 있기를 굶주린 개처럼 갈구한다. 머리가 지향하는 바와 마음이 반응하는 바가 뭐 이렇게 다를까. 한 몸뚱이가 서로 다른 걸 지향하는 꼴이 딱하다. 둘 중 무엇이 나은 입장인지도 모르겠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못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그 날 아침에 유튜브에서 들은 '청파 아침 묵상' 내용도 생각났다. 마침 성경 본문은 야고보서였다(야고보서에는 말에 대한 권면이 많이 등장한다). 거기서 김기석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독한 말, 정감 없는 말, 적대적인 말, 거짓말은 생명을 질식 시킨다… 바른 말이 늘 옳은 말은 아니다. 옳은 말이 늘 살리는 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말은 그래서 어렵다." *


나와 남편은, 남에게 절대 하지 않을 말이나 남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자신에게는 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뱉던 말을 (오해로나마) 남에게 들어보니 악플로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이 이해됐다. 나는 나를 여전히 다 못 받아들인다. 그러나 모진 말로 내 생명을 질식시키는 버릇은 고쳐야겠다. 내가 나를 하도 손가락질하다 보니 세상 모든 삿대질을 내 것이라고 착각할 지경이다.


남편의 비평을 받아들고 5분간 혼자 북 치고 장구 쳤다. 정신을 차린 후 답장을 보냈다. "바쁘실 텐데 꼼꼼하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여보."


오해는 풀렸지만 오해가 들이받고 간 마음의 멍은 얼얼했다. 나의 자기 인식과 상태가 우스워 보였다. 마음이 몇 시간이나 민망했다. 부스스한 내면을 단정하게 빗기 위해 산책을 처방했다. 산책로를 걸으며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그런데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의 엉터리 같은 잡담입니다.'라는 말이 제 글에 대한 총평은 아니지요?"


남편의 답장 : "내 코멘트 말하는 거예요."


다시, 나의 메시지 : "당신 코멘트와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에요. 당신 코멘트 덕에 제가 못 봤던 걸 봤어요."


집에 돌아와 출품할 글을 손봤다. 남편의 코멘트에 기대어 차분히 글을 고쳤다. 전보다 한결 나아진 글을 공모전에 제출했다. 며칠 후, 나는 공모전에서 낙방했다. 글과 관련된 공모전에서의 세 번째 탈락이었다. 그 불합격 덕에 지금 쓰고 있는 이 에세이를 얻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써라"라는 문장에도 조금 가까워졌다. 어려운 말과 글을 깨작 깨작 만져본다.









*. 청파 아침 묵상: 청파교회에서 유튜브를 통해 매일 제공하는 성경 묵상 영상, 2021년 1월 22일 자 중 녹취. (김기석, 『하나님의 숨을 기다리며』, 꽃자리)






이전 13화선생님의 단 하나의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