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여고

15

부산대 앞 먹자골목.

"여서부터는 택시 진입이 안 된다. 걸어카라."

택시 아저씨가 말했다.

밤 열시인데도 대낮처럼 환한 대학가 주변의 먹자골목.

"저 봉고차는 들어가잖아요.

아저씨 제발 들어가주세요."

나는 사정하듯 말했다.

봉고차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빵빵 경적을 눌러가며 먹자골목 안을 달렸다.

아니, 달렸다기 보다는 걸어간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봉고차는 아예 기어가고 있었으니까.

인파 때문에.

"아, 저 차 뭐야."

"짜증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봉고차에 심한 짜증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래.

더 이상 봉고차를 쫓다가는 오히려 잡힐 수가 있어.

여기서 내려서 걷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난 윤우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는 쌩 가버렸다.

우와.

사람들이 겁나 많았다.

꼭 대낮처럼 환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봉고차 쫓아가야지.

아,내가 사복만 입고 있어더라도.

"난 교복이라서 저들 눈에 띌지 모르니까,

윤우 네가 잘 좀 따라가 줘."

나는 윤우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알겠어."

윤우는 알겠다고 이야기하며 내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순간이었다.

하지만 막 구름에 탄 그런 부드러운 뽀뽀였다.

오마이갓.

봉고차는 어디에.

방금까지 옆에 있던 윤우는 사라졌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봉고차를 뒤쫓고 있으리라.

나 역시 태연하게 사람들 틈에 섞였다.

꼭 누구를 만나러 온 사람처럼.

나 혼자 교복 차림이었다.

하긴 밤 열시 교복 입고 유흥가를 누비는 학생은 없을 터였다.

곳곳에 온통 술집, 노래방, 당구장 간판이 가득했으니까.

간판 불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학생, 나랑 노래방에서 놀다 갈래?"

오마이갓.

이건 무슨 씹소리.

술에 쩐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건 거였다.

나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간 걸어가니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어느 남자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명함이었다.

'조건만남. 01X-XXX-XXXX'

라고 써 있었다.

이런.

그나저나 윤우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때 문자가 왔다.

윤우였다.

-금강 노래주점 찾아와. 거기로 들어갔어. 봉고차에 탄 애들. 나도 따라 들어간다.-

오마이갓.

나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내게 명함을 건네준 남자에게 물었다.

"금강 노래주점이 어디에요?"

"너 거기서 일하니?"

뜻밖에도 그 남자가 물어왔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난 당당하게 네, 라고 말했다.

"오늘 첫날이에요."

"저기 세븐일레븐 보이지?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다보면 백제 약국 나올거야. 그 근처 건물이야."

그 남자가 친절히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 남자가 말한 대로 세븐 일레븐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하지만,

백제 약국은 나오지 않았다.

어?

혹시?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건가?

혹시 그 사람이 눈치 챈 건가.

막 의심에 휩싸일 때였다.

혜경이.

혜경이가 보였다.

짧은 치마를 입고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흰 티를 입은 혜경이가.

혜경이가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티나지 않게 혜경이를 쫓았다.

여기서 혜경이를 만나다니.

이런.

아까 그 남자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위험하다.

윤우가 위험해.

어쩌면 지금쯤 무언가 연락이 갔을지도 몰라.

만약 혜경이가 지금 금강 노래주점에 가는 중이라면.

그렇다면.

아, 어떻게 해야 하나.

혜경이를 쫓아야 하나.

아니면 금강노래주점을 찾아야 하나.

혜경이는, 혜경이는

어디를 가는 걸까.

그래.

내 촉을 믿자.

난 혜경이를 쫓기로 했다.

몰라.

제발, 제발 금강 주점을 찾아 들어가라.

이혜경. 부탁이다.

혜경이의 차림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미니스커트에 긴 머리. 그리고 쭉 뻗은 긴다리와 스니커즈를 신은 혜경이는 빛이 났다.

이 현란한 부산대 앞의 휘황찬란한 빛을 이기는 그런 빛이.

마치 순정만화 속 여대생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다행이었다.

혜경이가 이렇게 눈에 잘 띄는 게.

"헤이. 아가씨."

누군가 혜경이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혜경이는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계속 당당하게 걸어가는 혜경이.

과연 어디를 가는 걸까.

제발 금강 단란주점을 찾아가기를.

나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혜경이가 발을 멈춘 곳은.

오마이갓!

왠 오락실!

혜경이는 오락실에 들어가더니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기 앞에 앉는 것 아닌가.

그리고 무아지경으로 게임에 빠지는 거였다.

혜경이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쌓다.

안돼.

얼른 금강주점을 찾아야 돼.

어디서 찾지?

이 넓은 부산대 바닥에 술집 하나를 찾는 건 마치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똑같은 것 아닌가.

미치겠네.

경찰에 연락할까.

경찰이 과연 내 말을 믿어줄까.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112를 눌렀다.

"네. 부산대 지구 경찰서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제 친구가 사라졌어요."

말 잘해야 돼.

조리있게.

난 속으로 나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네? 어디서요?"

"고등학생인데 금강노래주점이라는 곳에 있어요.

그런데 그 후로 연락이 안돼요.

그 곳에 어린 학생들이 많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네 사건 신고되었습니다. 곧 경찰이 출동할 겁니다."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윤우에게 이미 몇 차례 문자를 했지만 답은 오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전화가 안 터지는 곳에 있나.

제발. 제발.

에라 모르겠다.

"야. 이혜경."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는지 혜경이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게임스틱을 마구 휘둘렀다.

"야. 이혜경."

그제야 혜경이가 날 보았다.

깜짝 놀란 눈치였다.

"너 금강단란주점이라고 알아?"

헉.

혜경이는 깜짝 놀란 듯했다.

"네가 거길 어떻게 알아?"

"지금, 성심원 애들이 거기에 있어."

나도 모르게 실토를 했다.

이판사판이었다.

"거기가 어디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경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혜경이를 잡기 위해 달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더 뛸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있을 때쯤

"여기야!"

혜경이가 부르짖었다.

"이런 젠장! 애들이 여기에 있다고! 다 가만 안 둬."

혜경이는 화를 내며 들어갔다.

"애들 어딨어요?"

들어서자마자 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있는 곳.

여기가 술집 맞아 싶을 정도로

방들이 줄지어 있는 곳.

고요한 곳.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닌데.

너 번짓수 잘못 찾아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혜경이에게 이야기했다.

"너야말로!"

혜경이가 그들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애들 다 나오라 그래! 너네가 사람이냐?"

"이게 죽을라고."

뚱뚱한 남자가 다가왔다.

"야. 살살해.

그 분 따님이시다."

"아오씨."

혜경이를 손봐주러 다가간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소리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제발, 얼른 경찰이 왔으면.

아직 경찰은 오지 않았나 보다.

그 전에 증거를 찾아야 돼.

결정적인 증거를.

난 혜경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지 말라는 그런 뜻이었다.

"얘가 일부러 한 번 그런 거에요.

아저씨.

오랜만에 아저씨 놀래킬려구요.

사실 전 오늘 혜경이가 초대해서 온 거거든요."

분명 혜경이는 '아직도'라는 말을 썼다.

그렇다면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혜경이도 예전에는 이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화를 내는지도.

"얘 말이 사실이냐?"

아저씨는 혜경이에게 물었다.

혜경이와 난 눈이 마주쳤다.

"에이. 당연하죠.

많이 놀랐죠?

애들 어딨어요?

제가 오늘 얘 교육 좀 시키려고 데리고 온 거에요."

"그런데 왜 교복이야?"

순간 속이 뜨끔했다.

"얘 왠래 이 학교 학생 아니에요.

이거 교복 코스프레. 하하. 다 알면서.

이런 거 다들 좋아하잖아."

히히.

그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16번 방.

16번 방으로 가라."

검은 안경을 쓴 사내가 혜경이에게 말했다.

16번 방.

"얫, 썰!"

혜경이는 남자들한테 경례를 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따듯했다.

16번 방.

우리는 그 앞에 섰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 16번방에서.

우리는 문을 열었다.

순간, 칠흑같은 어둠이 앞을 가렸다.

누군가 뒤에서 내 눈을 가린 것이다.

"소영아!"

누군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우였다.

"무릎꿇고 앉아. 안 그러면 죽는다."

혜경이 목소리였다.

"쌍으로 죽여줄까.

아까 너 김소영 너한테 명함 준 그 오빠, 네가 노래주점 물어본 남자가 나한테 바로 연락줬어.

여기가 그렇게 만만한데인지 아니. 하하하."

혜경이 목소리가 빈 방을 울렸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혜경이네와 한패인가, 마음이 불안불안했다.

"경찰이다.

손들어!"

순식간에 얼음이 된 방.

혜경이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내 얼굴 위의 포대를 열었다.

후.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나는 윤우를 바라보았다.

온 몸이 결박되어 있는 윤우.

우리는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그래, 정말 다행이야.

경찰은 우리 셋을 모두 경찰서로 데려갔다.

나는 그동안의 자초지정을 다 경찰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윤우는 아까 아이들이 단란주점에 들어가는 걸 찍은 휴대 전화를 경찰에게 내밀었다.


다음날.

"교장선생님이 잡혀갔대."

"성심원 말야.

거기가 알고 보니 애들 데려다가 밤일 시키는 그런 곳이었어."

"오마이갓!"

이게 왠일이야.


뉴스에서는 온통 우리학교와 성심원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동안 붉은 여고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두 성심원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학교에서 실종되거나 죽은 아이들은 성심원 출신으로

성심원에서 지속적인 성학대를 받은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들은 지역인사에게 성접대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세상 말세다, 말세.

때는 이천년 밀레니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희와 혜경이도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 애들이 다른 학교로 전학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랬구나.

뉴스보도를 듣고나서야 짚히는 게 있었다.

왜 혜경이 죽고 사는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건지.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게 있었다.

왜 혜경과 재희는 서로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걸까.

한동안 학교는 시끄러웠다.

학교 재단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사학재단이었던 붉은 여고는 이제 없어졌다.

붉은 여고는 이제 사립이 아닌 공립 붉은 여고가 되어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학교가 되었다.

선생님들도 싹 다 바뀌었다.

박지은 영어선생님만 빼고.

왠일인지 박지은 영어 선생님은 새로운 학교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선생님께 달려가 배꼽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티비에서는 성심원의 비리에 대해 속속들이 파헤치는 보도가 계속되었다.

"이너서클.

오늘은 이 이너서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 박재기 기자.

이너서클이라는 게 뭐죠?"

"네. 이너서클이라는 게

바로 성심원에서 성접대를 하는 아이들끼리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단에서는 이 아이들을 지역 유지에게 성접대를 시킴으로서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아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심원에서는 이너서클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성심원 내에서 큰 특권층이 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세뇌를 시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외모가 뛰어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세뇌하여

이너서클이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끌여들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충격적이게도 이 이너서클에는 성심원을 운영하는 재단의 사립고등학교 붉은 여고의 교사들조차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하여 학교에서는 그동안 쉬쉬하는 분위기로 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마이갓.

그랬구나.

이너서클이 그런 곳이었어.

소름이 돋았다.

기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진실을 알리려는 아이들의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밝힐수는 없지만 그 학생의 노력으로 그동안 학교의 비리가 밝혀졌습니다.

그럼 사건이 계속 밝혀지는 대로 보도드리겠습니다."


앗싸.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보도 속의 '그 학생'이 나를 말한다는 것을.

와, 대박.

하지만 머리속에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이 있었다.


재희와 혜경이였다.


그들은 왜.


그 사건은 끝내 풀지 못한 채 난 그 학교를 졸업했다.

비록 내가 목표했던 연고대는 가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더 귀중한 것을 얻었으니까.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태도였다.

항상 당당하게 살기.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말하기.

그리고 진실하게 살기.

용감하게 살기, 와 같은 철칙을 마음 속에 익히게 된 것이었다.

윤우와도 물론 잘 되었고.

우리는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과는 다르지만 그 후로 씨씨가 되어 즐거운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결혼까지 이르렀다.

윤우와 결혼하던 날은 잊지 못한다.

그 날 얼마나 행복했는지.

물론 아웅다웅 다툴때도 많았지만 우리는 행복한 신혼생활 중이다.

그런데.

오늘 마트에서,

오늘 난 누군가를 본 것 같다.

마트 직원.

'이혜경'이라고 써 있었다.

얼굴 역시도 혜경이가 틀림없었다.

혜경이 얼굴이 남아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

호리호리한 몸매.

쭉 뻗은 다리.

말을 걸까, 말까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야.

놀라지 마.

나 오늘 혜경이 봤어."

"뭐?"

윤우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혜경이.

동우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거 봤어."

"진짜 혜경이 맞아?"

"진짜라니까."

다음 날 나는 동우마트를 찾았다.

혜경이가 있었다.

난 혜경이에게 다가갔다.

"혜경아, 나 소영이야. 너 이혜경 맞지?

붉은 여고 다녔던 이혜경."

"아닌데예."

갑자기 튀어나온 부산사투리에 깜짝 놀랐다.

내가 알기로 혜경이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혜경이는 거짓말이라면 밥먹듯이 하는 아이니까.

"여깄어. 내 번호.

너한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꼭 연락줘."

난 내 회사 명함을 혜경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지나갔다.

나 또한 그 마트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발길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혜경이가 한번은 연락해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혜경이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동안 나와 윤우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 것이다.

아이의 탄생은 경이로웠다.

나와 윤우를 반반 닮은 우리의 아이.

귀여워.

육아에 전념하느라 회사를 휴직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엉겹결에 받은 전화.

"나야. 혜경이."

숨이 멎었다.

"나도 널 한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야기해야 한다고."

그렇게 나와 혜경이는 만나게 되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십여년이 지난 세월이었다.

혜경이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온 걸까.

궁금한 게 한 보따리였지만 막상 혜경이를 만나자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런 내 맘을 눈치챘는지 혜경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재희와 나.

이제와 생각해 보니

우린 둘 다 피해자였어.

우리 둘 다 극심하게 세뇌당해 있었던 거야. 성심원하고 교장으로부터.

사실은 내가 빠져나가려고 한 게 맞아.

그 이너서클로부터."

그랬구나.

"죽음으로서."

"말도 안 돼!"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커피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았다.

혜경이가 조용히 하라는 듯 내게 신호를 보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래서 재희가 왜 네 탓을 했던 거야?

모든 사건이 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잖아."

"재희는 반쪽 세계에 살고 있었어. 내가 그 사건을 폭로할까봐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날 없애려고 했던 거야."

"네가 사건을 폭로하려고 했다고?"

"넌 그 날 네가 경찰을 부른걸로 생각하지?"

그랬다.

그 날 그 애들이 단란주점에 들어가던 날, 내가 경찰을 부른 걸로 생각한 거 맞았다.

그래서 경찰이 온 거라고 생각했다.

"이 지역 경찰들은 이미 성심원과 결탁되어 있었어. 네가 불렀다고 생각한 그 경찰, 사실은 부산대 지구 경찰이 아니야."

뭐라고?

난 할말을 잃은 채 혜경이를 보았다.

"그래.

사실은 사상구 경찰이야.

내가 미리 연락해 놓은."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네 도움이 컸지. 나도 단란주점 이름까지는 몰랐으니까.

그들은 자리를 바꿔가면서 성접대를 했으니까.

그런데 네가 단란주점 이름 이야기를 해주어서 난 재빨리 경찰에 연락할 수 있었어.

나도 그때 당시 결정적인 증거를 찾고 있었거든.

그런데 너와 윤우의 도움으로 그 현장을 덮칠 수 있었던 거지."


우와.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너는 내부고발을 하게 될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피식.

혜경이가 웃었다.


혜경이를 만나고 처음으로 본 웃음이었다.

청초한 웃음이었다.

"널 보면서."

"뭐?

나?"

"그래. 네가 우직하게 공부하는 걸 보면서.

네 책상에 써 있었던 거 '난 책상에서 세상을 본다'

그거 보면서 뭔가 머리를 세게 맞은 거 같더라고.

저렇게 공부하는 애도 있는데,

넌 공부에 진심이었잖아.

난 밤마다......

보여주기식 봉사활동에 가야 했으니.

점차 그런 활동에 환멸이 났어."


그랬구나.

"나도 말할 거 있어. 사실, 내가 변한 건 너 때문이었어.

네가 나한테 처음 말 건 날.

그 이후로, 서서히 용기가 생겨났던 거야."

나도 웃으며 혜경이에게 이야기했다.


"그래.

앞으로 만날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혜경이는 등을 돌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할말만 하고 등 돌리는 건 똑같애.

"잠깐."

난 혜경이를 돌려세웠다.

"고맙다. 이혜경."

"됐어. 재희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말고."


휴.

혜경이와 헤어지고 나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목이 말랐다.

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을 윤우에게 연락을 했다.

"잘 만났어."

"얼른 와. 보고 싶어."

그래. 돌아가야지.

날 기다리는 아이와 윤우가 있는 집으로.


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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