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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17. 2020

동생이 보낸 쉼표, 내가 답한 마침표

동생이 보낸 쉼표, 내가 답한 마침표     


며칠 전 문자를 받았다.

달랑, 쉼표 하나.

발신자는 동생이었다.

꼭 외계인이 보낸 부호를 푸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걸로 의사 표현을 하는 게 전부인 동생.

전신에 퍼진 아토피로 피부가 온통 빨간 반점인 동생.

길거리에 다닐 때 늘 고개를 수그리고 다니는 동생.

사진을 찍을 때도 정면을 응시하지 못해 항상 아빠에게 혼나는 동생.

서른 넷 남자인데도 키가 내 어깨밖에 오지 않는 동생.

아직도 가끔 옷을 뒤집어 입는 동생.

아침이면 밥 먹자고 몇 시간이고 애원해야 거실에 나오는 동생.

하지만 우리 가족들에겐 여전히 귀염둥이인 동생.

다운증후군 동생.


동생이 태어났을 때 난 여섯 살이었다.여느 때처럼 유치원에서 돌아와 “엄마” 하고 안방으로 달려갔다. 안방에는 흰 천에 쌓여 아랫목에 누워 있는 갓난아이가 있었다. 엄마는 아기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안의 막내였던 나는 동생에게 심한 질투가 났던 걸로 기억한다. 불행히도, 딸 셋을 내리 낳은 후에 아들을 낳은 엄마의 웃음은 거기서 끝이 나고 만다.


어른들은 시간이 지나도 머리를 가누지 못하는 동생을 보며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구 개월째 큰 병원에서 염색체 검사를 했고 동생은 다운증후군으로 판명되었다. 동생은 세 살이 지나서야 옹알이를 시작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동생은 나를 ‘어니’라고 불렀다. 세 자매들이 ‘언니’라는 말을 자주 쓴 데서 배운 말이었다. 엄마는 동생의 머리가 혹여 좋아질까 봐 매일 오메가 쓰리가 든 ‘스쿠알렌’을 짜서 먹여주었고 씹어 먹을 수 있는 약 껍데기는 나에게 주었다. 그 비린 맛이 좋아서 동생이 스쿠알렌을 먹을 때면 난 늘 엄마 곁에 붙어 있었다.


느리지만 동생이 차곡차곡 성장하는 걸 보는 건 우리 가족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동생이 처음 엄마라고 한 날. 일어나서 엉거주춤 서 있던 날. 한 발 내딛던 날. 한 쪽 벽에서 반대편 벽까지 걷던 날. 아빠가 사 온 장난감 볼링으로 스트라이크를 친 날. 긴 줄을 흔들어 박자를 맞추며 동요를 듣던 날.      


동생은 일반 초등학교에 다녔다. 다행히도 같은 반 아이들, 그중 여자아이들은 동생이 귀엽다고 많이들 좋아해 주고 예뻐해 주었다. 동생 생애에서 일반인들과 즐겁게 어울릴 수 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보면 동생은 친구들과 어울려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면서 너무나 환히 웃고 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동생만의 아픔은 있었던 것 같다.


중학생이던 나는 가끔 동생을 데리러 갔다. 늘 동생 반 복도에서 수업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동생을 데려가곤 했다. 그날도 동생 반으로 갔다. 그때 본 그 모습이란.


동생 반에는 오직 동생뿐이었다. 체육 시간이었던지 모두 운동장에 나가 있었고 동생은 하염없이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노을은 왜 그리 빨갛던지. 그날의 그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진으로 가슴에 박혀 버렸다. 아마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다. 가자, 재명아. 동생을 데리고 나오던 길에 가지고 있던 용돈을 탈탈 털어 동생에게 맛있는 걸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를 특수학교로 가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동생이 처음부터 특수학교에 갔던 건 아니다. 되도록 일반인과 어울리려 집 옆에 있던 남자 중학교에 들어갔었다. 그때만 해도 남녀 공학 중학교가 없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늘 동생을 데리러 가고 데려왔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남자 중학생들은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었다. 내 느낌에 동생은 그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면 심한 무시를 받았거나.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갑자기 고함을 치거나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화를 냈다. 분명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동생의 웃음은 날로 줄어갔고 우리 집의 분위기는 날로 어두워져 갔다. 부모님은 동생을 특수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일반 중학교에서 마음만 다치고 전혀 배울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동생은 비장애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잃었다. 사회성이 발달한 다운증후군의 특성상 초등학교 때처럼 비장애인들과 교류하는 게 동생을 위한 최선의 교육이었겠지만 학업 위주의 중학교 교육 시스템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 교육을 하기엔 너무나 적절치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시스템 문제라고 하기엔 지금도 난 동생에게 너무나 미안한 점이 많다. 동생의 책가방을 들여다 볼 생각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만 동생이 특수학교에서 뭘 배우고 있는지 하나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 나도 고삼인지라 공부 때문에 너무 바빠 동생을 돌볼 여지가 없었다.


부모님은 동생의 장애를 인정하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워낙 다혈질에 급한 성격의 아빠는 동생의 장애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남들의 말을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동생을 볼 때 아빠는 늘 한숨을 내쉬었다. 동작이 느린 동생을 닦달하는 일도 잦아졌다. 언어 치료를 시작하더라도 빠른 차도를 원하는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주지 못하는 동생의 부진 때문에 치료는 자주 중단되었다. 그런 집안 분위기가 난 그저 답답했다. 그리고 난 대학교에 들어갔다.


동생은 특수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끝내 직업과 연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고등학교 졸업 후 집에 있거나 복지관의 종일반 프로그램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는 꽃 화분 만들기, 사진 찍는 것 배우기, 비누 만들기, 도자기 컵 만들기 등의 가벼운 활동들을 했다.


동생은 수제 비누를 많이 가져왔다. 딱 보기에도 선생님이 대신 만들어 준 티가 너무 났다. 동생이 직접 만들었다기에는 당장 나가서 팔아도 될 만큼 예쁜 꽃 모양으로 조각된 완벽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도자기 만드는 작업만큼은 동생이 참여하는 게 분명했다. 어딘가 어그러진 컵. 겉 부분에 삐뚤빼뚤 쓰여 있는 동생의 이름. 그래도 복지관이라도 다니는 게 어딘가. 동생이 대견했다. 방학에 집에 돌아오면 난 동생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동생은 ‘후레쉬맨’, ‘바이오맨’ 등 전대물을 좋아했다. 그때만 해도 비디오와 만화책을 대여해주는 대여 방이 많았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비디오 대여 방에 가서 동생이 좋아하는 전대물을 빌려서 돌아왔다. 동생이 전대물을 좋아하는 건 존중받아야 할 엄연한 동생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동생은 후레쉬맨, 바이오맨 같은 전사들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지 않았을까. 내게 동생은 전대물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아빠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퇴근하고 돌아와 전대물을 보는 동생의 모습을 볼 때 또 아빠의 한숨, 배어 나오는 슬픔, 그러다 터져 나오는 역정, 그런 게 너무나 싫었다. 그러한 모습이 날 학창 시절부터 집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게 했다.


지금도 동생은 복지관에 다니고 있고 일흔이 넘은 아빠가 통학을 시켜주고 있다. 아직도 아빠는 동작이 느린 동생에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화를 내었다가, 그런 자신을 자책하다가, 갑자기 사랑한다고 한다.      


동생의 장애를 간접적으로나마 겪으며 ‘혹여 나도 결혼해서 장애아를 낳으면 어떡하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 거 같다. 장애아를 낳을 가능성은 아무도 배제할 수 없다. 출산을 하는 모두는 얼마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신이 내게 장애아를 선물로 주신다면 기쁨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동생의 문자를 받고 어떤 답문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동생은 왜 내게 쉼표를 보낸 걸까. 어쩌면 나에게 고맙다는 신호를 보내는 걸까. 구정 때 다음에 와서 언니와 함께 동생의 방을 꾸며주기로 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걸까.


동생아, 넌 항상 누나 맘속에 있어. 알지?    

쉼표의 짝, 마침표 하나를 찍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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