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는 밝고 건강한 느낌의 아이다. 이런 아이가 교실에 있다면 나도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배려심도 많고 우울하게 처지는 에너지도 없다.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사람. 내가 느낀 예서는 그런 아이였다.
그러나 10대 여자아이들의 생태계는 그렇게 단순하고 호락호락하지 않다. 단짝, 질투, 삐짐, 사과, 절교......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의 생태계에서 소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 시절에는 좀 영악해야 친구 관계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고 손해를 덜 보는 입장에 설 수 있다.
나는 그날 예서와 ‘수필식 일기 쓰기’를 해보고 싶었다. 앞서 ‘현아’의 일기 쓰기 코칭에서 해봤던 것인데 경험 위주의 일기에서 벗어나 생각 위주의 일기를 써보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 아니면 어떤 현상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나 가치관을 적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공부는 왜 해야 하나’ 그런 소재로 일기를 쓰는 것이다.
예서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적당한 글감을 찾고 있었는데, 내가
“착한 게 뭘까? 착함에 대해 써볼까?”
했더니 오히려 예서는 ‘나쁨’에 대해 써보겠다고 했다.
“그거 좋네!”
우리는 바로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나쁜 사람이란 무엇일까?’ 예서가 적은 첫 문장이었다. 예서는 그 질문에 대한 일반론적인 답을 적다가 ‘자신의 성격에 안 맞는다고 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왜냐하면’하고 이유까지 깔끔하게 붙여주었다. 역시 3학년 정도 되면 글쓰기의 기본 틀은 잡혀지는 모양이다. 학교에서 배운 티가 났다.
'상대의 성격을 존중하지 않으면 결국 세상 모든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된다.' 정말 맞는 말이네요.
그러나 생각 위주의 글을 쓸 때 자주 겪게 되는 문제가 길게 쓰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적고 나면 그다음에 쓸 말이 없어진다. 예서도 그 부분에서 막혔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이 바로 ‘에피소드’다. 자신이 그 생각을 하게 된 계기 또는 그와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을 쓰면 이해도 쉽고 글이 재밌어진다. 당연히 예서에게도 그렇게 코칭했고 예서는 1학년 때 일을 적었다. 사실 그 사건이나 상대 아이와 겪는 문제 등을 자세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우리 예민한 10대 언니의 아픈 과거를 들추는 것 같아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나쁜 건 꼭 나쁜 짓을 해야만 그런 게 아니야.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도 나쁜 거야.’라는 생각을 예서는 무려 2년 동안이나 해 온 것이다.
예서는 사실 영악함이나 교활함과는 거리가 먼 아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예서는 마냥 여리고 약해서 푹 고꾸라질 것 같은 아이도 아니었다.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예서가 순수해서 얻게 될 마음의 생채기는 분명 있을 것이다. 좋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한 것이 부정당하는 경험, 오히려 나쁨과 술수가 승리하는 상황. 그 속에서 겪게 될 혼란도 있겠지만 예서는 극복할 것이다. 부정적이거나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것에 대해 거리두기를 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예서는 당차보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뭘 하든 예서가 가지고 있는 밝고 건강한 기운을 잃지 않고 잘 지내주었으면 좋겠다.
수필식 일기 쓰기
주로 고학년이나 여자아이들에게 권하는 방식입니다. 혹시 아이가 경험을 나열하는 형태로 일기를 쓰고 있다면, 가끔씩 생각만 적는 ‘수필식 일기 쓰기’를 권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 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기준, 가치관 등이 나타나고 나중에 주장하는 글쓰기를 할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른들도 수필식 일기를 쓰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됩니다. ‘내 가치관이 이러하구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구나’ 하고 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검은 여우는 예서 자신을 나타내는 거겠죠? 늘 남을 위해 한 발 뒤에 서 있는 예서의 마음. 괜히 짠해져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