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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콩 Nov 09. 2021

글씨가.. 맞춤법이.. 생각 많은 2학년 남자아이 일기

 승제는 ‘피아노 에서’를 썼다가 “아 맞다! 띄어쓰기!”하면서 내 얼굴을 다봤다. “어 괜찮아. 그냥 써.” 해주자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때렸다’를 ‘태렸다’로 쓰고 “아닌데......” 하고 지우개로 지웠다. ‘그래서’를 썼을 때는 “엄마가 이 말 쓰지 말랬는데......” 하면서 나를 또 쳐다봤다. ‘그래서를 뺄까요? 빼고 뒷말을 이어도 되요? 아님 다르게 써요?’ 묻는 듯 했다. 이미 승제는 한 글자 한 글자 연필에 힘을 꽉 주고 반듯반듯 글을 쓰는 중이었다. 뭔가 생각도 많고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했다.     


 “제가 어디서 봤는데 그래서, 그리고 같은 접속사를 너무 많이 쓰면 안 된다고 들어서요.”     


 옆에 있던 승제 어머니가 해명을 하셨다. 그 말도 맞다. 접속사가 너무 많으면 흐름이 끊기고 글의 맛이 좀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의 글쓰기에 대한 얘기다. 아이의 글쓰기는 좀 다르다. 나는 접속사를 권장하는 편이다. 아이들은 접속사에 따라 ‘다음 사건이 어떻게 됐지?’ ‘왜 그렇게 됐지?’ ‘그래서 어떤 기분이었지?’ 생각을 이어갈 수 있다. 당연히 글도 길게 쓸 수 있다.     


 이번 코칭은 승제의 누나, 형까지 3남매를 모두 하는 일이었다. 아이들마다 어쩜 그렇게 성격이 다른지, 너무나 당연한데도, 참 신기했다.     


 우리 승제는 천상 막내였다. 애교도 많고 아직 어리광도 있었다. 막내다 보니 형과 누나에게 빼앗긴 ‘관심과 사랑’에 대한 목마름도 있었다. 그래서 일기를 쓰다 멈추고 내게 말을 거는 일이 많았다. 조잘조잘 얘기도 잘했다. 자신에게 온통 집중되어 있는 이 상황이 신 나고, 최대한 누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승제에게는 누나와 형을 동경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보다 뛰어난 형과 누나를 보며 뭐든 척척 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또 엄마 마음에 쏙 들게 해서 폭풍 칭찬을 받았던 경험도 있는 것 같다. 항상 엄마를 의식하며 엄마 마음에 들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의 기준대로 살기에 우리 승제는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어딘가 하나의 방식에 메여있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군인이 내 배를 엄청 세게 때리는 느낌이었다’라는 표현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반듯한 글씨체가 인상적인 승제의 일기



 아무튼 승제는 그날 배가 아픈데도 여러 학원을 가야 하는 상황에 대해 일기를 썼다. 아마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승제의 배 아픔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또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배가 안 아팠다. 그래서 약을 먹이고 학원을 보냈던 승제 어머니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는 승제에게 만약에 승제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뭘 하고 싶었냐고 물었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집에서 쉬는 거?”했다. 나는 그걸 써보라고 했다. 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는 약 먹고 집에서 쉬고 싶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을 써 내려갔다. 아까처럼 한두 글자 쓰다가 내게 말을 걸거나, 띄어쓰기를 의식하며 주저하는 모습도 없었다. 진지하게 아니 진솔하게 그 마지막 문장을 쓰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에서 글이 줄 수 있는 힐링의 힘을 보았다. 우리 승제에게 필요한 것은 그 힐링의 힘일 것 같다. 일기에서만큼은 자유로운 영혼 그대로의 승제를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나와 형을 의식하지 않고, 엄마의 지시에 따르지도 않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마음 그대로 써 내려갔으면 좋겠다.     


 9살 인생살이에 벌써 내면과 외면의 갈등을 고민하고 있는 승제. 그 어려운 숙제를 떠안고 있으니 가끔은 그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 않을까? 그럴 때 일기가 위로의 공간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자유로운 형식의 승제 일기. "잠시후 ..." 라는 표현이 만화를 연상시켜 재밌다. ㅎㅎ




일기라는 ‘감정의 쓰레기통’을 만들어 주세요.     


사춘기 시절 일기를 쓰셨나요? 저는 썼습니다. 그 당시 일기는 감정의 쓰레기통이었습니다. 온갖 욕과 원망과 억울함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감정의 쓰레기통을 만들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 코칭을 통해 좋은 글쓰기 노하우를 얻어가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글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에 기대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답답할 때 찾아쓰는 일기.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그런 도피처는 하나쯤 필요하니까요.     


승제는 질문에 골똘히 생각하며 답을 했다. 그래도 정해진 틀과 지시에 잘 따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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