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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콩 Nov 12. 2021

경험은 잘 쓸 수 있는데, 감정을 못 쓰겠어요 ㅜㅜ

감정표현이 단순한 3학년 남자아이의 일기

 영도를 만나러 가는 길은 무척 긴장이 되었다. 영도 어머니가 수학 선생님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많이 긴장된 상태에서 일기 코칭을 시작했다. 영도에게도 이런 수업 자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낯설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 영도는 바로 ‘벡터’를 들고 와 (본인은 자랑의 의도였겠지만)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AI 애완로봇 '벡터'


 “영도야. 우리 아예 벡터로 이야기를 써 볼까?”

 벡터 덕분에 긴장도 풀리고 좋은 글감도 얻을 수 있었다. 영도는 처음에는 쑥스럽다는 듯이 엉덩이를 쑥 뺐는데,

 “다른 친구들은 벡터가 없잖아. 벡터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쓰면 좋을 것 같은데?"

 하자, 벡터를 흘끔흘끔 거리며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영도가 쓴 벡터 소개글. 그야 말로 애완 동물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기분이네요!


 영도는 벡터에 대해 쓰다듬어주면 웃고, 손 위에 올려놓으면 하지 말라고 화내고, 추락 방지 센서를 가지고 있고, 큐브도 가지고 논다며 너무 귀엽고 좋다고 글을 썼다. 영도 표정만 봐도 정말 귀엽고 좋아하는 게 보였다. 그렇지만 뭔가 그 좋은 감정을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 글에도 적었지만, 아이들에게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하라고 했을 때 ‘즐겁다’ ‘행복하다’처럼 단순히 말 바꾸기식 표현법을 보이는 일이 많았다. 그것도 좋은 방법인데, 나는 ‘구름 위에 있는 기분’ ‘따뜻한 햇살을 받는 기분’ 등등 좀 더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도에게 “벡터가 얼마큼 귀여워? 벡터만큼 귀여운 게 뭐가. 있을까?” 했더니 “피카츄!” 했다.

 아이다운 대답이라 피식 웃으며 그렇게 써 보라고 했다. ‘피카츄보다 더 귀엽다’는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사실 ‘감정을 표현한다’ 이건 어른도 어렵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럴까? 유교 사상이 생활에 녹아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유독 더 감정 표현이 어려운 것 같다. ‘희, 노, 애, 락’ 이 네 가지 말고 다른 표현이 뭐가 있을까?  

   

 사실 영도 어머니도 ‘제가 감정 표현이 어려워요.’ 하셨다. 논리적으로 1번, 2번 번호 매겨가며 쓰는 글은 잘 쓸 수 있는데, 다양하게 감정 표현을 하는 글은 어렵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과거 오은영 박사님이 하신 방법인데, 감정을 객관식으로 제시하고 고르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번 화난다. 2번 짜증난다. 3번 귀찮다. 4번 슬프다.’ 이 중에서 어느 감정에 더 가까운지 아이에게 고르게 하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하려면 영도와 영도 어머니 둘 다 감정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화나는 것은 무엇이고 짜증나는 것은 무엇인지 대화를 하며 느껴가게 될 테니 말이다.     


 나는 이것을 ‘감정의 어휘력을 늘린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외국어를 배울 때 단어를 모르면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컵을 프랑스어로는 뭐라 불러야 하나 모르니까 알아도 말로 할 수가 없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은 느꼈는데 적당한 말을 몰라서 표현할 수가 없다. 외국어를 배울 때 어휘력을 늘리듯이 감정의 어휘력도 늘릴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감정의 어휘력은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나는 ‘사전을 찾으시라’라고 권하고 싶다. 감정을 사전에서 찾다니!! 하지만 한번 예를 들어보자.      


화나다: 성이 나서 화기(火氣)가 생기다.

짜증나다: 마음에 탐탁하지 않아서 역정이 나다.

성가시다: 자꾸 들볶거나 번거롭게 굴어 괴롭고 귀찮다.

분하다 : 억울한 일을 당하여 화나고 원통하다.     


 이 뜻을 자세히 읽어보면 ‘화나다’는 ‘화가 나서 몸과 마음이 뜨거운 상태’ 그 상태에 집중된 단어이다. ‘짜증나다’는 ‘뭔가 마음에 안 차니까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더 크다. ‘성가시다’는 귀찮은 마음이다. ‘분하다’는 억울한 마음이다.     


 감정을 사전에서 찾는다는 것이 의외일 수 있으나, 나는 이보다 더 정확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사전에는 유의어, 반의어도 있다. 어떤 단어가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했는지 다양한 어휘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러기에 앞서 내 감정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지’ 즉 알아차리려면 자꾸 들여다봐야 한다. 감정이 일어났을 때 무시하지 말고 자꾸 ‘이게 뭘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경험은 잘 쓰는데 감정은 ‘재밌다’, ‘슬프다’ 밖에 쓰지 못 한다면 아이의 감정 어휘력을 고민해보자. 보통 엄마, 아빠도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 함께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감정 표현을 배워보자.  

   



아이가 감정 표현을 하면 무시하지말고 대화를 시작하세요!     


감정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무척 중요합니다. 어느 날 아이가 ‘힘들어’라고 말할 때 무시하지 말고, 왜 힘든지 이야기를 들어 봐주세요. 학원이 많아서 힘들면 ‘지쳤구나’라고, 과제가 어려웠다면 ‘잘하고 싶었는데 안 돼서 속상했구나’, 친구 관계 때문이라면 ‘오해가 생겨 억울했구나’ 라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엔 ‘오해가 생겨 억울한 게 아니라 잘못 될까봐 걱정된다고!’라며 부모의 추측성 대답 대신 자신의 정확한 감정을 툭 내뱉기도 합니다. 이런 대화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는 느낌, 수용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의 어휘력도 늘릴 수 있어요.     


사진 찍히는 게 무척이나 쑥스럽다는 영도. 정수리만 나왔지만, 저는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을 기억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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