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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콩 Dec 08. 2021

엄마와 아들의 기싸움 끝은?

그날은 아들 친구네 가족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공간을 대여해서 그곳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게임도 하고, 재밌게 놀 생각이었다. 밖으로 전망이 탁 트인 그곳에서 신나는 주말을 보낼 생각에 나도 들떴고 아이들도 들떴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 아들이 징징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친구들이 자신과 놀아주지 않아서. 그 순간 나는 함께 온 엄마들과 장 볼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었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격하게 몸을 바닥에 부딪치며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항의를 했다.     


 “너 그러려면 집에 가!”     


 그 말에 아들은 정말 운동화를 신고 집으로 돌아갈 태세를 보였다. 문밖으로 나갔고, 엘리베이터를 타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나도 열이 받았다.     


 “그래 집에 가자!”     


 그곳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20~30분 남짓. 나는 정말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태세로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들은 ‘안 갈래요.’ ‘미안해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아들이 먼저 올라탔다. 1학년 아들의 반격이었다.


 ‘하 참나, 어이가 없어서.’     


 나도 이를 악물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출처:픽사베이


 그렇게 우리는 걸었다. 집으로. 위험한 도로 가나 횡단보도에서만 아이의 등을 떠밀었을 뿐 나는 아이의 손도 잡아주지 않았다. 내가 앞장서 걷고 아이가 뒤따라오는 모양새였다. 한참 걷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은 이런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도 그에 질 새라 더더욱 말을 걸지 않고, 더 빨리 앞장 서 걸었다.     


 그렇게 아파트 앞까지 도착했다. 뒤돌아보니 아이가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는 이랬다.     


 첫째 혼자 집에 들어가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운다.

 둘째 그때 안 울면 약 1시간 뒤 배고프다며 내게 전화를 한다.

 셋째 배고픔도 간식으로 해결하고 버틴다면 3~4시간 뒤 심심하다거나 무섭다며 전화를 한다.

 넷째 전혀 전화하지 않고 버티다가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봐라! 난 혼자서도 집에 잘 있는다!’라고 보여준다. 하지만 그 승리가 씁쓸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곧 느낀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다시 한번 물어봤다.    

 

 “너 혼자 집에 있을 거지?”     


 아이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요 놈 봐라?’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 아이를 현관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문이 쾅 닫혔다. 아이가 우나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아이가 전화를 하나 안 하나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진동이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나는 의기양양하게 전화기를 보았다.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아이가 생떼를 부리기 전에 아빠들은 장 보러 마트에 갔었다. 돌아와서 상황을 알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한 번쯤은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매번 달래주기만 했잖아.”     


 내 말에 남편은 일단 알겠다고 하더니, 나를 태우러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만나더니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아이를 혼내서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나를 지하 주차장에 두고, 아이를 데리고 내려왔다. 아이는 훌쩍이고 있었다. 엄청 혼난 모양이었다.     

 

놀 땐 또 잘 논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모임 장소로 돌아왔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잘 놀았다. 하지만 내 마음엔 계속 앙금이 남았다. 아이도 그런 것 같았다. 주변 어른들이 ‘이제 괜찮아?’하고 물었을 때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서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까 낮에 정말 집에 가고 싶었어?”

 “아니”

 “그런데 왜 엄마한테 다시 돌아가자고 안 했어?”

 “어차피 안 들어줄 거잖아.”

 “아닌데. 엄마는 그 말 기다렸는데?”     


 그 순간 나는 아이의 행동을 내 멋대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의 콧노래와 침묵은 ‘개의치 않다’가 아니라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였던 것이다. 아이는 거절이 두려워 나에게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가 나와 기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것이다. 그 순간 아이는 엄마인 내가 먼저 손을 뻗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외로웠을 것이다. 슬펐을 것이다. 자책했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은 건포도처럼 바짝 쪼그라들어 있었을 것이다.      


 아이와 기싸움 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른의 입장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엄마랑 전혀 ‘싸울’ 생각이 없는데, 싸우고 있는 것은 정작 엄마다. 어른이다.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랬을 텐데, 어른이 싸움의 태세로 접근하니 문제가 더 딱딱해지고 악화됐던 것이다. 옛 어른들 말씀에 ‘애랑 똑같이 군다’가 바로 이런 것 아니었을까. 어른인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고, 내가 먼저 해결의 노력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이가 돌아가자고 말하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돌아갈래?’ 물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 혼자 집에 있을 거지?’ 가 아니라 ‘너 혼자 집에 어떻게 있겠니? 그냥 우리 돌아갈까?’ 해 볼걸.     


 미안했다. 어른 답지 못 한 엄마라 정말 미안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의 기싸움은 엄마의 깨달음으로 끝났다. 아니 처음부터 싸움은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옹졸함만 있었을 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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