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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콩 Dec 11. 2021

엄마가 되어 처음 해 본 녹색어머니 교통봉사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그러나 순번에 따라 이번엔 내가 녹색 어머니로 교통 봉사를 나가야 했다. 8시 20분까지 정문 앞 횡단보도로 가야했기에 남편이 오전 반차를 내어 아이들을 챙기고 나는 학교로 향했다. 물품 수령은 어떻게 하는지, 누가 안내하는 사람은 있는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일단 학교로 들어갔다. 요즘은 코로나로 학부모가 학교에 들어갈 수 없기에 교문을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사전에 선생님께서 문자로 보내주신 장소로 가보니 ‘녹색 어머니회 용품 보관함’이라고 적힌 캐비닛이 보였다. 캐비닛 문을 열고 난감했다. 초록색 조끼. 안전을 위해 입는 조끼였지만 진짜 모양 빠지는 생김새였다. 몰랐는데 초록색 조끼는 프리사이즈가 아니다. 목 부분에 작지만 사이즈 표시가 있었다. 두꺼운 패딩 위에 입어야 하니 넉넉한 사이즈를 골라 입었다.


나를 당황시켰던 초록색 조끼


다행스럽게도 정문 앞에는 교통 봉사를 해주시는 학교도우미분이 계셨다. (다른 횡단보도에서는 녹색 어머니 두 분이 함께 하셨다고 한다.) 혼자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분의 수신호에 따라 나는 깃발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활동에 임했다. 처음엔 거기 서 있는 게 그렇게 부끄러웠다. 손도 소심하게 움직이고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런데 하면서 깨닫게 된 거지만, 손은 쭉 뻗어서 카리스마 있게 깃발을 움직여줘야 다. 그래야 모퉁이를 돌아오던 차량이 내 깃발을 보고 제대로 멈춰 설 수 있다. 그리고 뭐든 카리스마있게 해야 주변에서도 따라주는 법.      


 그리고 두 번째로 깨달은 것. 그것은 ‘배려’였다. 당연히 교통봉사자가 도보자들을 위해 하는 배려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도보자들이 교통봉사자에게 하는 배려였다. 그 도보자가 설사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천천히 걸어오다가 내 깃발이 통행 가능하다고 열려졌을 때, 또는 학교 도우미분의 수신호가 통행이 가능하다고 알려올 때 서둘러 달려와 길을 건넜다. 여러 사람이 함께 건너서 혹시나 저 신호가 끊길까봐 걱정이 되어 달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 건너는 상황에서도, 천천히 걸어도 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도 그들은 달렸다. 봉사자들의 배려에 응해주는 마음이었다.     


 몸이 워낙 작아, 책가방 크기가 자기 몸의 반은 될 것 같은 어린 학생도 그렇게 했다. 교복을 입고 어른들 말에 무조건 반기를 들것 같은 중학생 아이도 그렇게 했다. 어린이집에 갈 아이의 손을 잡고 걷던 엄마도 종종종 달려와 그렇게 길을 건넜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배려해주는 마음이 너무나 예쁘고 고마웠다. 인사성 바른 몇몇 아이는 ‘고맙습니다’ 인사도 다.  

   

 별거 아닌 교통 봉사였지만, 하기 전까지 귀찮다고만 생각했던 봉사활동이었지만, 막상 시작하고도 창피하다 생각했던 그 활동이었지만 9시 정각이 되었을 때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9시가 되어 교통 봉사를 끝마칠 때는 ‘보람’이라는 식상하지만 사실인 그 감정이 느껴졌다. 가슴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배려받았던 그 40분의 기억. 사람 좋아하는 나라서 더 그 순간이 의미 있게 다가왔는지는 모르지만 참 소중한 경험이구나 싶었다.      


이것이 내 인생 첫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마친 소감이다. 엄마인 나는 아이 덕분에 참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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