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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콩 Dec 15. 2021

엄마는 대체될 수 없다

 얼마 전 아들 친구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아홉 살. 얼마든지 친구 집에서 자고 갈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도, 우리 아들도 바랐고, 나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우리 둘째가 아주 오랜만에 잠을 설쳐주셨다. 수시로 깨고, 울고, 발버둥을 치며 나의 수면을 방해했다. 나는 아이를 토닥이며 거의 새벽 3~4시까지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뒤, 새벽 5시쯤이었던 것 같다. 아들의 친구가 깼다.      


 “엄마 보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엔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어쩌다 잠에서 깼니? 괜찮아. 아줌마가 안아 줄게.”     


 나는 아이를 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고, 흥얼흥얼 자장가도 불러주고, 조용히 잘 수 있게 그냥 옆에 누워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계속 울었다. 시계를 보니 5시 45분이었다.     


 ‘그래 6시에 일어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시간이면 괜찮겠지.’     


 나는 그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서로 부스스한 모습으로 만났다.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폭 안겼다. 아홉 살도 애는 애다.      


 그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는 생각했다.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대체 뭘까 생각하다 마음속에서 끌어낸 문장이 ‘엄마는 대체되지 않는다’였다.      



엄마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2~3세 때의 우리 아들


 나는 잠 못 들던 우리 둘째에게 했던 것처럼 그 아이도 안아서 토닥이고, 마음을 읽어주고, 편안하게 해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엄마를 찾았다. 아무리 다정하게 해줘도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없었다. 그 아이에게 그저 나는 영원한 아줌마였던 것이다.     


 사실 우리 아이도 마찬가지다. 매일 게임을 시켜주고, 살찐다는 소리 없이 뭐든 먹을 것을 내오고, 포켓몬 카드도 수백 장씩 사주는 친구 부모들을 보며 부럽다는 얘기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 집 가서 살아라.’라고 했다. 그러면 아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그 집 가서 살겠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니 참 가혹한 일이구나 싶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도 없는데 한번 부모 자식의 연을 맺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가 없다니. 아무리 난폭해도, 학대해도, 인생에 걸림돌이 되더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다니.      


 그런 마음으로 우리 아들을 보니 참 측은했다. 나는 별 뜻 없이 말을 던져 아이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다. 다른 엄마들처럼 좋은 식재료와 좋은 음식 솜씨로 끼니를 채워주지도 못 한다. 타인에게 상처받고 돌아와 이불을 끌어안고 웅크리며 자책도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한데. 내가 부모 자격을 가질 수 있나. 이 아이의 성인까지의 시간을 책임질 수 있나.     


 누군가는 나에게 더 부족한 부모도 많다며 위로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도 잘하고 있다며 위안을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느슨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 자식의 연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무겁게 받아들인다. 무엇이 옳은 일일까, 더 나은 선택은 무엇일까, 아이에게 나는 어떤 인생을 가르칠까, 늘 고민이 된다. 어젯밤도 그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그렇다. 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많은 부모들이 그러할 것이다.          


2017년 겨울,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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