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끝(17)
드디어 질 들뢰즈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포스터 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 그리고 해체‘에 관한 발표이후, 두번째 발표다. 간만에 영혼을 갈아넣었다.
발제는 음악가이자 철학연구자인 파올로 드 아시스(Paulo de assis)교수의 영문 책중 한 챕터로, 저자는 그의 글에서 질 들뢰즈의 ‘배치(assemblage)’개념을 음악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동안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해답을 준 것이 들뢰즈(Gilles Deleuze)였다.
그는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서구의 전통적 사유방식, 즉 나무 형태의 위계적 중심구조에서 벗어나 리좀(rhizome, 뿌리줄기, 땅 밑 줄기, 헛뿌리)중심적 사고, 즉 접속되고 분화되고 단절되고 연결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가변적이고 역동적이며 유목적인 사유방식을 지니라고 한다.
그는 오래된 사상가들로부터 새로움을 사유할 수 있는 틈을 찾으려고 했다. 그것은 이원론적인 사고가 아니라 내재성의 평면’ 즉 ‘일원론적 다원론’의 형태였다.
그에게 있어 모든 실재는 ‘ 배치(assemblage)’이고 이것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책은 배치물(assemblage)이며, 그렇기에 그것은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는 하나의 다양체(multiplicity)이다. 다양하다는 것(le multiple)은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의 지위로 격상되는 것이다.
내가 재즈를 하고 국악을, 트롯을 접목하고, 심리학에, 음악치료에, 시각적 도구까지 사용하여 표현하려는 시도는 들뢰즈에 따르면 누군가의 사본이 아니라, 나만의 지도를 만드는 과정이다. 내가 만든 다양체는 계속 연결, 접속들을 늘림에따라 그 규정, 크기, 차원이 불어난다.
그는 끊임없이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line of flight)을 늘이고 연장하고 연계하고 변주시키라고 종용한다.탈영토화를 통해 나만의 영토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어 고른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리라고 속삭인다.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가라고 한다.
재즈 계보 나무 하나로 씨뿌려서 줄곧 이어 가는 것이 아닌, 나의 관심의 뿌리는 꺾어 꽂아서 다양체가 되었다. 그리고 유장한 강물위에 유유히 오늘도 흘러간다. 어느방향에서 또다시 변형, 무엇이 될른지는 모른다. 단지 계속 수로를 만들 뿐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첫 발견이후, 이번주 발표준비를 통해 좀더 그의 개념들이 명확해진 느낌이다. 다음주엔 프로이트, 라캉에 대한 발표가 있다.
그것만 하면 당분간은 발표지옥에서 벗어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