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끝(23)
타임슬립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죽음은 영원한 반복과 변주 그 사이의 망각과 자유의지의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다시 내 인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다시 태어난 나는 전 생을 망각한다. 기억하지 못하므로 똑같이 반복하여도 지루함이나 억울함이 없다. 전생에 착한 일을 하면 후생에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권선징악, 윤회 사상과는 다르다. 단순히 한 유형의 스토리 라인을 지닌 채, 태어나고 죽고 다시 이 전으로 돌아가 계속 내 인생 분량만큼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기계처럼.
다만 영원히 반복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그 안에서도 자유 의지의 선택적 순간이 있고, 큰 깨달음이 있으면, 변주가 생긴다. 죽을 운명은 언제나 죽어야할 그 자리에서 죽고, 살 운명은 그 찰나에서 어떻게든 살게 된다.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고 원수는 항상 원수이며 안될 운명은 어떻게든 안되지만 계속 된 반복은 그 무언가 크나큰 희생이나 선행, 거대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계기가 주어지면 틈이 생기고 결국 차이를 보이며 원래 모습과는 다르게 점차 변형되어가는 것이다.
증명할 길은 없다. 하지만 니체도 그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 사상’을 내세웠다. 영원한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우주와 인생은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사상이다.
나의 설명과 그것이 다를지라도, 니체의 영원사상이 그 영원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가끔씩 나는 그 무언가 계속 반복되고 변형되는 세상에 던져진 채, 주어진 내 역할만 회귀하는 배우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물론 데쟈뷰의 오류를 경험하거나 직관의 열림으로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들의 매개를 통해 어렴풋이 나의 전생을 기억해낼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의 과거회귀로 인해, 나의 현재와 과거를 미리 이야기해주지 않는 한은 (또한 내가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 한은) 완전히 자각해내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