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주방은 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좁다. 가스레인지는 집처럼 3구짜리를 쓰지만, 요리를 할 수 있는 싱크대 폭이 3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개수대에 펼쳐둔 롤매트가 아니면 도마 하나 놓기도 벅찬 사이즈다. 그래도 20년간 살림하던 주부의 관성이랄까. 조미료부터 조리도구까지,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있을 건 다 있는 편.
주방은 작지만 요리에 필요한 식재료만 구입하면 웬만한 요리는 거의 다 가능하다. 가끔은 샌드위치나 떡볶이를 만들어 한 끼를 해결하기도 하고, 집에서 챙겨 온 밥으로 김치볶음밥이나 콩나물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비 오는 날엔 김치전이나 부추전도 부쳐 먹는다. 음식을 만들어 혼자 식탁에 차려놓고 먹다 보면 마흔 중반에 이게 웬 자취생활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히려 자취를 하던 20대 시절에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의 자취방에 룸메이트로 지낸 한 학기 동안에는 미숫가루와 라면 말고는 요리를 한 적이 없었고, 대학을 나온 후 선배네 집에 얹혀살았던 몇 개월도 주방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고시원 같은 원룸에 살 때도, 결혼 전 옥탑방에 살 때도 요리는 청소나 빨래 같은 귀찮은 일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20년 간의 결혼생활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미혼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하던 약식과 강정을 만들어 어린이집 선생님께 선물하고, 온갖 종류의 청을 담그거나 잼을 만들었다. 일이 많아 바빠지고 손목이 아파지기 전에는 혼자 김장까지 했으니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하는 데 두려움이 없어졌다.
마을카페를 운영한 9년 동안 손수 내린 커피와 수십 인 분씩 샌드위치를 만들던 일을 생각하면, 가끔 작업실에 들르는 손님들에게 커피 한두 잔 내려주는 건 일도 아니다. 공간에서 후원주점 행사가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돈가스를 튀기고 어묵탕을 끓여내고 파전까지 부쳤으니. 재료만 있다면 세상에 못 만들 음식이 없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카페를 운영할 때 야채를 넣은 계란 지단으로 만들었던 우리밀 샌드위치.
설립 초기에 판매하던 비빔국수/ 집에서 만든 살구 조림에 직접 딴 산딸기를 듬뿍 넣어 화채로 만들어 손님께 대접하기도.
더구나 우리 시댁은 오랫동안 연간 일곱 차례의 제사를 지내온 집안이다. 7년 전부터 우리 집으로 제사를 모시면서 다섯 차례로 줄였지만 아직도 녹두를 직접 불리고 갈아서 전을 만든다. 20년 전 결혼 후 맞이한 첫 설명절 때부터 맏며느리로서의 내 임무 중 하나가 '녹두를 잘 가는 것'이었다. 이제는 녹두를 갈아 엄지와 중지로 살짝만 만져보아도 30초쯤 더 갈아야 할지, 다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제수용으로 크게 만드는 3장의 녹두전 외에 친척들과 나눌 녹두전까지 만드느라 부치는 양이 적지 않다.
집이나 마을카페에서 행사를 치르느라 해왔던 음식들에 비하면, 작업실의 좁은 주방에서 혼자 복닥거리는 요리는 거의 소꿉놀이 수준에 가깝다. 집에서와 달리 그렇게 특별한 음식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을 초대할 때 집에서 잘하지 않던 감바스나 파스타를 만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집에서 먹던 것과 비슷한 메뉴들이다. 막상 하고 보면 양도 별 차이가 안 난다. 작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더라도 만들고 보면 늘 4인분은 되는 것 같다.
혼자 먹을 거면서 음식을 4인분씩 만드는 이유는세 가지.
첫째, 어차피 조리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과 시간을 생각하면 한 번에 많이 만드는 게 가성비가 높으니까. 둘째, 만들 때 많이 만들어야 한 번이라도 더 먹을 수 있으니까. 셋째, 기왕 만든 음식, 가족들과 나눠 먹으면 좋으니까(가장 중요하다).
내가 먹으려고 만든 건데, 좀 나눠줄게.
뭐 이런 마음이랄까. 그러니 작업실에서의 요리가 집에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딱 한 가지뿐이다. 가족들이 아닌 나를 위해 요리한다는 것.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작업실을 얻기 전에도 나를 위해 식탁을 차리곤 했었다.
음식을 하는 일이 지치고 짜증 날 때.
아무도 나를 위해 요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서글플 때.
그럴 때면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반찬을 정갈하게 담아 혼자 식사를 했다. 이미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나 식재료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스타일링하고 눈으로 즐기면서 천천히 먹는 것이다.
누가 차려준 건 아니지만 대접받는 느낌이랄까.
작업실을 얻고 나서는 예전만큼 스타일링에 공을 들이진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것 같다. 집과 달리 독립된 공간에서의 살림은 지치고 짜증 나지 않으니까. 집에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반찬을 만들 때가 많고(내가 입지 않은 옷을 빨고, 먹지 않은 그릇도 설거지하고, 쓰지도 않은 물건을 치워야 하고...) 혼자서 4인분의 살림을 해야 하니 힘든 것이고. 이곳에서는 딱 1인분만큼의 간소한 살림만 해결하면 되니 굳이 나를 위한 밥상 차리기에 힘을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음식을 하는 날이면 5분 거리에 있는 두 딸 생각이 나곤 한다. 뭘 제대로 챙겨는 먹었으려나 하는 걱정 반, 새로운 음식 먹이고 싶은 욕심 반이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새로운 요리를 한 날은 아이들에게메시지를 보낸다.
- 김치볶음밥 만들었는데 먹고 갈래?
- 샌드위치 만들어놨어. 들러서 가져 가.
그러면 입맛이 비슷한 둘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온다. 둘째는 집 근처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가 배가 고프면 집 대신 이곳에 들러 간식이나 밥을 챙겨 먹을 만큼 자주 방문한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성향이 닮아서 떡볶이나 부침개를 한 날은 꼭 불러서 같이 먹는다. 작업실을 잘 방문하지 않는 큰 아이도 오전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말에는 미리 메뉴를 알려주면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귀가한다.
내 영혼의 소울푸드인 떡볶이와 부침개.
집에서 반찬을 할 때도 '나를 위해 만든 음식을 가족들과 나눈다'고 생각하면 힘이 덜 든다. 식구들 먹을 음식이 아니라 내가 먹을 반찬이다 생각하고 요리하는 것이다. 밑반찬으로 만든 멸치볶음 중 4분의 3은 집에 남겨두고, 4분의 1은 작업실로 가져오는 식이다. 그러면 그 반찬은 가족을 위해 요리한 게 아니고, 나 먹으려고 만든 반찬이 된다. 그저 내가 좀(많이) 남겨두고 왔을 뿐. 그리 생각하면 요리를 하는 장소는 별다른 기준이 못 된다. 내 입에 들어갈 음식을 만든다는 전제를 깔고 나면, 모든 요리가 나를 위한 셈이니(세뇌..).
그런 전제가 늘 가능한 건 아니다. 특히 작업실이 아닌 집에서 요리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누가 먹을 것인지 머릿속에 떠올리곤 한다.
남편이 좋아하는 고등어구이.
큰 아이가 잘 먹는 계란말이.
둘째를 위한 어묵볶음.
내가 먹고 싶은 된장찌개.
그런데 이렇게 각자의 입맛을 고려해 식탁을 차려도 어느샌가다 같이 고등어 가시를 바르고 찌개를 떠먹게 된다. 이미 식탁에 오른 음식에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은 없다. 이건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의 식사니까.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과 반찬을 다 같이 나누어 먹는 것. 과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집안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흔한 풍경을, 퇴니스(Ferdinand Tönnies, 1855-1936)는 '공동 저장물의 공동취식'이라고 불렀다.
독일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철학을 공부했던 퇴니스는 28세에 저술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에서 친족 공동사회의 중요한 특성으로 '사물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향유하는 것'을 꼽았다. 그에 따르면 가족은 '집'이라는 한 터전에 살면서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다.
이러한 공동사회의 가장 강력한 원형은 '부모와 자식 관계'인데, 친족 공동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공동 저장물의 공동취식'이다. 과거에는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공동 노동을 했기 때문에 식량을 함께 나누는 것은 친족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중요한 권리이기도 했다.
공동사회의 친족은 대개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관계지만,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더라도 강력한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다. 멀리 거주하는 부모님이 자식들이 올 때 반찬이나 텃밭에서 난 작물을 나눠 주는 건(심지어 택배로라도 부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퇴니스는 유기적이고 상호 호혜적인 공동사회가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인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이익사회로 변화되었다고 파악했는데, 이러한 그의 이론은 1881년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사회를 설명하기에 무리가 없다.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에 지배되면서 이익사회로의 모습은 더욱 강화되고 공동체적인 공동사회가 지속적으로 쇠퇴하긴 했지만,가족이 '공동 저장물'을 '공동 취식' 하는 관계라는 것만은 변함이 없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아이들이 사교육으로 몰리면서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같은 냉장고(공동 저장물)에서 음식을 꺼내 먹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가족이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는 여전히우리의 보편적인 일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집과 5분 거리에 떨어져 지내면서 음식을 공유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단순히 요리에 들어가는 노동과 식비를 줄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족이라는 공동사회의 구성원, 그중에서도 자식을 둔 부모라는 유대감으로 내가 아이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공부했을 퇴니스와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밥까지 차려야 하는 내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퇴니스는 친족 공동사회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터전이 '집'이라고 말했지만, 21세기엔 나처럼 독립적인 공간을 꾸리고 집을 오가며 친족 공동사회를 유지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만들기 귀찮아서 늘 사먹던 에그샐러드. 작업실에선 그리 귀찮지 않은 마법...
주방 크기로 비교하면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작업실로 들고 와야할 거 같은데 바쁜 학기 중엔 작업실에서 반찬을 만들어 집으로 들려보내곤 했다.
더운 여름을 나느라 만든 오이피클과 양배추물김치. 집에서 큰 통을 가져 와 작업실에서 담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