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그린다는 것

by 안녕

아마도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드로잉 소모임에서 했던 인물드로잉.


손님이 오건말건 의자에 앉아 책을 붙잡고 40분 동안 모델 노릇을 했다. 나중엔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40분을 버텼다. 3주간 그런 식으로 모델을 섰는데 신기하게도 모델을 서는 동안에는 손님이 오지 않았다.(좋은 일인지, 슬픈 일인지ㅠ)


그림을 모아 놓고 보니 드로잉은 역시나 제각각 다른 선,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신기한 것은 모두 그림을 그린 본인을 닮게 그렸다는 점! 기본적인 머리모양이나 옷은 그렇지 않은데 얼굴의 각이나 체형 등 전반적인 분위기가 마치 그린 이 자신을 투영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S언니는 얼굴형과 체형도 본인과 비슷하게 그리고 선도 막힘없이 쭉쭉.

그림 속의 인물은 실제의 나보다 좀 더 단단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성적인 J 언니의 드로잉 속 모델은 차분하고 얌전한 분위기를 풍긴다.

겉모습보다는 유약한 내면을 지닌 듯한 인물의 분위기가 나를 닮았다.



예민하고 꼼꼼한 성격이 나와 비슷한 H언니는 내가 그린 것처럼 선을 쓰는 느낌이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생김새는 언니 자신과 닮아서 내가 언니를 그려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가진 것을 나누어주기 좋아하고 마음이 넉넉한 Y언니는 자신의 풍요로움만큼이나 나를 넉넉하게(?) 그려주었다. 인물의 표정이나 생김새에서 내면의 여유가 느껴진다.

몇 십분씩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일이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이런 결과물을 보는건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단순하고 소박한 즐거움 외에 삶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꺼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일면 반복적이고 비슷해보이지만 실은 각자가 매우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있으며, 그 것도 자신의 경험, 기질과 정서, 물리적 상황과 내면 상태에 따라 상당히 주관적이라는 것을 나는 자주 경험했다. 더구나 그림 그리기는 자신이 가진 내면의 거울로 세계를 비춰 보는 행위와 비슷하기 때문에 사물이던 인물이던 자신의 일부분을 반영하거나 투사하게 마련이라서, 같은 사물과 대상을 두고 그림을 그려도 결과물은 이렇듯 다 제각각이다.


이 날, 그림을 모아 놓고 서로 다른 느낌과 생김새의 나를 바라보노라니 마치 나라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 양면성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그림을 그렸던 구성원들의 감정까지 더해져 선뜻 나라고 이름붙이기 어려운 인물들이 새롭게 창조된건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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