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그린다는 것1

by 안녕

한동안 '나'를 그리는 일에 재미를 붙여 연달아 작업하던 나는 언젠가부터 그림을 그리지 못해 전전긍긍해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날도 거실에서 혼자 종이와 물감을 펼쳐 놓고 낑낑대고 있던 참이었다. 무언가를 그려야 할 것 같긴 한데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옆에서 동생과 놀던 아홉 살 난 딸아이가 대뜸 엄마 물감으로 그림을 좀 그리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림을 시작도 못하고 절절매던 나에 비해 종이와 물감을 그저 놀이도구로만 생각한 아이는 분명 천진난만하게 그림을 그릴 터였다. 괜히 약이 올랐다. 나는 먼저 나를 한 장 그려주면 종이와 물감을 마음껏 쓰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엄마를 그려달라고?"

"응. 여기 가만히 서 있을 테니까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한 장만 그려 줘"

"보고 그리라고? 어려울 것 같은데.."

"엄마 사랑한다며! 그림 한 장 정도는 그려줄 수 있잖아"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나는 아홉 살 밖에 안 된 딸에게 사랑의 증거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떼를 썼다. 평소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말하던 아이는 별 수 없다는 듯 알겠다고 했다.

늘 연필로 그림을 그리던 아이 손에 볼펜을 쥐어 주었다. 그리다가 틀려도 괜찮으니 지우거나 고칠 생각일랑 하지 말고 그냥 손 가는 대로 그리라고 일러둔 뒤였다.


차렷 자세로 거실에 서 있은지 십 여분쯤 흘렀을까. 아이가 다 되었다며 종이를 내밀었다. 얼굴이 이상하게 그려졌다는 둥, 보고 그리는 게 힘들다는 둥, 투정도 함께였다. 평소 큰 눈을 가진 작고 귀여운 캐릭터나 그리며 놀던 아이에게 눈앞의 대상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가 꾹 참고 머리부터 발 끝가지 그려서 내민 그림은 나랑 꽤 비슷했다.

나는 내친김에 욕심을 부려 등에 날개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종종 아이에게 새처럼 날고 싶다는 말을 해두었던 덕분에 아이는 군말 없이 날개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랑으로 색까지 칠해주었다. 나는 한동안 이 그림을 거실 벽에 붙여 두고 흐뭇한 마음으로 감상하곤 했다. 아이가 그린 것이었지만, 마치 내가 그린 자화상 같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림을 볼 때마다 뿌듯함과는 다른 묘한 감정이 일었고, 나는 '어차피 날지도 못할 날개'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아이가 알았다면 억울해할 일이었다. 정작 날개를 그려달라고 부탁한 건 나였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왜 날개를 작게 그려주었지?'라는 의문을 버리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벽에 붙여 둔 그림을 떼어 일기장에 오려 붙인 날, 나는 그림 옆에 이런 짐작을 써 내려갔다.




멀리 날아갈 것을 염려한 걸까. 그 애는

그토록 작은 날개를 달아주고

한 손 가득 책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쥐어 주고,

땅에 굳게 발을 내디딘 채로, 비상을 꿈꾸는 나에게

당신은 날아가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연약한 날개로 섣불리 날았다가는

상처 입고 추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그려준 유치한 파란 날개는

장식품일 뿐이니 절대로 퍼덕거릴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고

당신에게 예쁜 초록 양말을 신겨 줄 테니

그 두 발로 자신 곁에 서 있으라고

엄마는

자유 같은 걸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상징뿐인 날개만으로 만족하라고





그즈음 나는 나 자신을 그리는 일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 어느 그림에서도 온전한 내 모습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때 그렸던 자화상은 모두 상처 입거나 해체된 모습들이었고, 그것은 자신을 잃고 희석되어가는 내 영혼에 대한 비유였다.


나는 어딘가 깊숙이 숨어 있는 진짜 나 자신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그리는 일은 창작의 기쁨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불안을 두 눈으로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파란 날개가 불편했던 건.


내가 자신을 오랜 시간 방치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뒤늦은 자각은 현실에 대한 공포와 자기연민을 불러일으키던 참이었다. 그러니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희생당하고 있는 가여운 처지라는 자기연민에 빠져 아무런 그림도 그릴 수 없던 내게 떠나고 싶은 갈망과 한 곳에 붙박인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날개'는 너무나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방식이었으니까.


결혼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그림을 통해 나를 찾고자 하는, 그래서 세상 밖으로 당당히 발을 내딛고 싶은 어떤 열망이 있었다. 그 열망 뒤에는 나의 외로움과 상처를 드러내고, 위로받고 싶은 감정이 숨어있었지만 그걸 알아챈 건 한참 뒤였다. 내가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해 포기하고 희생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곱씹으며 주위 사람들과 세상을 은근히 비난하고 싶어 했다는 것도.



내겐 고통이나 욕구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속으로 삼키고 감추는 것이 익숙했다. 불만을 제기하고 갈등을 불러일으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상처 입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일을 나누자고 요구하기보다는 내가 너무 많은 일들을 혼자 하고 있으며 늘 참고 견디는 건 나라고,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곤 했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믿었었다. 언제나 희생자 역할을 자처하며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어 했던 어리고 나약한 영혼. 그게 나였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감정을 소모시키는지, 아무리 누군가를 원망한다 해도 상대방은 변하지 않으며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막아 왔던 건, 동료도, 가족도, 아이들도 아니었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자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자신을 위로하는 그림이 그리고 싶어 졌고, 온전한 나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잘 보살펴야 하며 자신을 잘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잘 보살필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누군가 나를 위로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잘 보듬어주어야 한다는 것


이 것이 내 안의 불안과 싸우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얻은 답이라면 답이었다.








자신을 보듬는 방식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나 자신을 온전히 그리는 일이 바로 그 첫걸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관심의 범위를 나에서 사물로, 풍경으로, 주위 사람들로 옮겨갈 수 있었다.


아이들을 기르느라 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람으로 나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고 믿는 지금(그렇게 믿기로 결심했다는 편이 옳겠지만), 이제 파란 날개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더 이상 의무와 역할로 버무려진 육체를 지탱하는 날개가 아닌, 많은 것들을 비워내고 한 껏 가벼워진 영혼이 날아오르기를 기다리는 날개이며 계절이 바뀌는 어디쯤, 아침을 부르는 상쾌한 파랑을 닮은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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