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놀이

by 안녕
헬메르 :... 당신은 이 집에서 행복하지 않았다는 거야? 노 라 : 네,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당신은 언제나 제게 친절하셨죠. 하지만 이 집은 놀이터에 지나지 않았어요. 친정아버지가 저를 어린 인형으로 취급했다면, 당신은 다만 저를 큰 인형으로 취급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들이 제 인형이 되었어요. 아이들과 놀아 주면 아이들이 기뻐하듯이 저는 당신이 놀아 주면 그것이 기뻤던 거예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결혼이었어요.

[인형의 집_헨릭 입센] 중에서




노라가 자신을 알기 위해 8년간 결혼생활을 해 왔던 집을 나가고자 했던 것처럼, 나는 그림을 그리며 안이 아닌 밖에서 내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묻고 싶었던 것 같다. 너, 지금 혹시 인형처럼 영혼 없는 껍데기로 살고 있지는 않니?라고. 지금 생각해도 무서운 질문이다.

그 질문에서 비롯된 드로잉.


파티에 참석할 일도 없고, 젊고 아름다운 8등신의 미녀도 아닌 내가 인형이라면, 어떤 옷이 어울릴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옷장을 열어서 내가 선택한 옷은 평소 즐겨 입지 않는 스타일의 외출복이었는데, 주로 결혼식장이나 시댁에 갈 때 입으려고 산 다소곳하고 얌전한 옷들이었다. 아무래도 인형에게 헐렁한 티셔츠나 청바지보다는 조금은 화사해 보이는 옷이 좋을 듯해서.



옷을 그렸으니 옷을 입힐 사람도 그려야지.


6등신의 아담한 체형, 나름 굴곡이 있는 허리선과 단아한 자세의 인형과 외출 준비가 완료되었어도 아이들이 배고프다면 언제든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한 손에는 주방도구를 든 외출복들. 별다른 환상이 없는 그림이었다.

완성하면 스캔받고 프린트해서 오리고 놀아야지, 마음먹었는데 정작 놀이는 한 번도 못 했다. 어차피 현실에서 늘 하는 일을 굳이 놀이하면서까지 재현할 필요는 없으니까.


숨겨진 신분의 비밀도, 왕자님도, 무도회도 없는 인형놀이에 무슨 재미가 있다고. 늘 바비인형을 끼고 놀던 두 딸아이도 엄마가 인형 놀이할 그림을 그린다고 신나 하더니 정작 그림을 보고선 의욕을 상실한 건 매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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