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어린왕자때문이었다. 고등학생때 읽은 어린왕자 이야기는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같았는데 결혼 후 두 아이를 키우며 읽은 어린왕자는 어쩐지 서글픈 자서전같은 느낌을 주었다.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 그는 속으로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하고 생각할 수 있거든.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는다면 그에게는 갑자기 모든 별들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무도 없는 집의 한가운데 서서 이런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을 때면 별들이 사라진 캄캄한 우주를 혼자 떠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나의 꽃을 꺾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럴때면 나도 어린 왕자처럼 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었고, 슬플 때 석양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소혹성을 가진 어린 왕자가 부러웠다.
소혹성이 무슨 자기 명의의 아파트 한 채라도 되는 것 같은 부러움과 질투에 사로잡혀 처음으로 만들었던 소혹성 B613호.
유치하지만, 어린 왕자가 사는 B612호 옆에 자리한 행성이길 바랐다.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지구본에 고장난 구식카메라, 장난감 휴대폰, 낡은 고무장갑, 치약 뚜껑, 다 쓴 면도기, 음료수 병, 망가진 시계같은 것들을 분해하고, 자르고, 색칠하고, 붙이면서 한 달동안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자그마한 살림살이를 손으로 만들며 느꼈던 재미와 달리,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에 불과했던 이 우울한 행성은 보관에 따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그 후론 아이들의 인형나라에서 장난감 노릇을 충실히 하는 중이다.
B613호의 해체 이후 나는 창조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나만의 행성을 평면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엔 실제로 휴식하며 놀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번 째 b613. 제목은 'Where is my planet?'
그런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쯤 비어 있던 작은 창고를 짧게 나마 작업실로 쓰게 되었고, 그 창고의 이름 역시 B613호가 되었다.
당시 자원활동을 하던 마을도서관과 같은 3층에 자리한 비어 있는 두 평 정도의 작은 창고였는데, 도서관에선 창고에 넣어 둘 만큼의 짐이 없었기에 늘 썰렁하게 비어 있던 공간이었다. 나는 책상과 의자 하나쯤은 들어갈만한 그 공간이 참 아까웠는데, 너무 좁아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을도서관 개관 후에도 1년여를 비어 있던 그곳은, 결국 마을도서관 일을 하며 창고를 호시탐탐 노리던 나의 차지가 되었다.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입주를 하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바닥과 벽에 대충 시멘트만 발라 놓은 창고였기 때문에 우선은 칠을 해야 했고, 겨울을 나려면 난방공사까지는 아니어도 조립식 마루 정도는 깔아야 했다.
칠을 하던 날, 그렇잖아도 좁은 창고에 난방도 되지 않는 곳이라 추워 보이지 않겠느냐는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아하는 청록색 페인트를 구입한 뒤 과감히 내부와 출입문을 칠했다. 그러나 칠을 끝내 놓은 흐뭇함도 잠시, 사람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겨울 내내 푸른 수족관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에 시달렸던 것이다.
내부를 찍은 사진이 몇 장 있었는데 컴퓨터에 저장하지 못한 채로 휴대폰을 분실하게 되는 바람에 남은 건 이 그림 한 장 뿐이다.
다행히도 커다란 오리털 실내화를 신고 털모자를 쓴 채 담요를 덮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지인이 전기난로 하나를 기증해준 덕분에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었다.
그때 그곳엔 추위를 무릅쓰고라도 혼자 있고 싶을 만큼의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태어나서 처음 가져 보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점이 나를 매료시켰다. 짧은 기간, 내 이름이 쓰인 계약서도 없고 임대료도 내지 않았지만 아무도 감시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너무 열심히 할 필요도 없고 평가받을 결과물도 없는 그 공간이 참 좋았다. 그저 이 곳에서 무엇을 하며 놀까, 만 생각하면 되었으니까. 좁은 책상에 노트를 펼쳐 놓고 무언가를 끄적거리거나, 책을 읽다가 엎드려 자거나, 허술한 코드로 우쿨렐레를 마구 튕기거나.
세 번째 B613호는 심하게 좁고 춥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저 상징에 불과했던 이전의 작업과 달리 실체가 있는 공간이었으므로 나의 만족감은 꽤 높았다. 게다가 비어 있던 아파트 관리동의 창고라 운영비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못 버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너무 좁은 나머지 아무도 초대할 수 없는 그 곳에서 나는 혼자 해볼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원없이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