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행위지만 가끔은 거울속의 영혼을 바라보는 것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어떤 역할을 위해 태어났고 그 일이 끝나면 소멸하는 운명을 지닌 사물들에게서 어떤 감정을 마주하는 일은 감성을 풍요롭게 해줄 때도 있지만, 늘 유쾌한 경험만 주는 것은 아니다.
선으로 몸이 꼭꼭 감긴 드라이기라던가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아무 곳으로도 떠날 수 없는 의자들, 다 쓰고 나면 버려지는 볼펜처럼 일상에서 흔히 쓰는 물건들을 그릴 때면 종종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자유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누군가를 위한 도구로만 쓰이다가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 모습에서 사람과 닮은 구석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사물을 그릴 때 대상에 감정을 투영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나니 그 다음부턴 의자도 그냥 의자가 아니고, 볼펜도 그냥 볼펜으로 보이지가 않게 되었다. 어느땐 바나나가 무척 피곤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고, 볼펜은 참 책임감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의자는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매우 지쳐 보이던 바나나. 어찌나 측은해 보이던지.
별 생각없이 쓰고 나면 버리던 드로잉 도구들을 열심히 그리게 된 것도 이들에게 '고마움' 이라는 감정을 느낀 뒤부터였다.
주변을 둘러 싼 모든 물건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지만, 자주 만지고 사용하는 물건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익숙함과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말이 없어도 통하는 느낌이랄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딱딱하거나 푹신한 재질을 요리조리 만져도 보고, 눈으로 모양을 천천히 쓰다듬다보면 없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이 물건을 그동안 어떻게 대해왔나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그래서인가. 가까운 사람은 잘 안 그리게 된다. 특히 가족은. 그리다가 온갖 감정의 폭풍을 다 겪게 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