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소유하고픈 욕구를 강하게 자극하는 사물들이 있다. 나의 개성을 부각시켜주고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은.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형편상 미술을 공부할 수 없었던 내게는 다양한 화구들이 늘 갈망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구매한 수많은 사물들 중엔 '어디에 두었었지? 그런 물건이 나한테 있긴 있었던가' 하는 것들이 있는 반면, 자주 보지 않아도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오랜 친구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산지 20년이 넘은 홀베인 드로잉 잉크
펜촉을 20초에 한 번씩은 담구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써야 하는 홀베인 드로잉 잉크.
스테들러사의 펜들은 이제 말라버려 잉크도 안 나오는데 버리질 못하고 있다.
4B만이 미술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 파버카스텔사의 3B 연필과
좀 더 세밀한 드로잉을 가능하게 해 주는 스태들러사의 0.2mm 라이너 펜.
그저 보기만해도 흐뭇하던 렘브란트 물감. 요즘은 둘째가 액체괴물을 만들때 섞어 쓰고 있다.
'렘브란트'라는 이름과 발음이 주는 매력때문에 주저없이 샀던 렘브란트 물감들.
정작 파스텔이나 연필로 그림 그릴 일이 별로 없는데도 사들였던 여러 개의 픽사티브들.
'보호'라는건, 정말 필요한 일이라며 샀으나, 정작 많은 보호를 필요로 할 만큼 열심히 그림을 그리진 않았기에 여전히 찰랑찰랑 소리를 내는 픽사티브까지.
그 외에도 사춘기시절부터 사들이기 시작한 바바라 시리즈 붓들, 미켈란젤로 파렛트, 뻬베오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 캔손 스케치북, '반 고흐 고체물감'이니 '로우 앤 다우니'같은 이름의 미술용품들. 옷이나 가방, 신발처럼 걸치고 다니며 자랑할 수도 없는 것들인데도, 마치 사지 않으면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던 불안감에 사곤 했던 물건들.
얼마전 이사를 하면서 정리하려고 늘어놓았더니, 테스트 말곤 손도 대지 않은 48색 파스텔이며, 수년째 백지 상태인 스케치북, 포장조차 뜯지 않은 지우개 말고도 쓰지 않은 것들이 커다란 쇼핑백 하나에 가득 찼다. 분명 사면 너무나도 잘 쓸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쓰지도 않을 물건들을 잘도 사들인 셈이었다.
결국 한 번도 쓰지 않은 미술용품들을 정리해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는 지인의 딸에게 넘겨주었다. 괜히 서운한 마음은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하면서 쌓아두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 할 나이도 되었지' 하며 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