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물들

by 안녕

남편은 가끔 밤늦게 편의점에 가서 술을 사 와선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며 혼자 마시는 습관이 있다. 술은 육체와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남편이 간혹 남겨 놓은 빈 술병을 보는 것은 늘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 술병들을 그리기 시작한 건 늘 보던 소주병 대신 새로운 디자인의 술병이 등장한 다음부터였다. 나는 그것들을 노려보고 또 노려봤는데, 싫어서가 아니라 탐이 나서였다.


낯선 물건들 중 간혹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결국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책상 위에 한 병, 두 병 모아 놓고 며칠 전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코디언 북을 만들기 위해 열 칸으로 접어 둔 종이에 그렸던 탓에 점점 더 다양한 디자인의 술병이 필요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틀 전엔 "00마트에서 수입맥주 6병을 만원에 판대"라며 슬쩍 정보를 흘리기까지 했다. 결국 남편은 정말로 그 마트에 가서 술을 사 왔으나, 서로 다른 6병의 그림을 그리게 될 거라며 흡족해하던 나의 상상과 달리 그것들은 모두 똑같은 제품이었다. 기대가 틀어져 시무룩한 나는 이왕이면 골고루 사 오지 그랬느냐고 타박했고, 속내를 알 리 없는 남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똑같은 걸로 6병을 사야 만 원에 주는 거래"


아뿔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다음엔 *미구엘 사 먹어. 그게 맛있대"



사실 맛은 알 바가 아니었다. 열 칸에 총 10병을 그려야 하니 이쯤에서 갈색의 낮은 병을 하나 그려주면 어울릴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부추겨 놓고선 혼자 고민에 빠졌다. 계산을 해보니 6병씩 여러 번을 사는 것보다 그냥 낱개로 한 병씩 사는 게 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어쩌면 집에 맥주병을 안 버리고 있는 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곧바로 SNS에 빈 맥주병이 필요하단 글을 올렸다. 마침 마을카페에서 함께 자원 활동을 하는 동네 언니가 소식을 듣고 집에 있던 빈 맥주병을 쇼핑백에 한가득 담아 주었다. 술이라면 질색하는 내가 맥주를 두어 번 권장한 덕에 신이 난 남편은 그 뒤로 그릴 계획도 없는 캔맥주만 계속 사 오는 불상사가 생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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