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에게

by 안녕

오랫동안 책장에 처박혀 있던 어린왕자를 꺼내 들었다. 서른 중반에 읽은 어린왕자는 어릴 적 읽었던 동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많은 것이 변했는데, 어린왕자는 여전히 어리고 순수했으며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며 썼던 Harcourt 출판사의 1971년 영문판 [The Little Prince] 필사본.



손에 기름을 잔뜩 묻힌 채 고장난 비행기의 엔진을 고치던 주인공에게 어린왕자가 묻는다. 장미에게 가시는 어떤 의미냐고. 그는 장미의 가시가 소용없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양이 꽃을 먹기도 하는지를 묻는 어린왕자의 질문에 자신은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며 귀찮은듯 말한다.


어린왕자는 얼굴이 창백해질 만큼 화가 난 목소리로 외친다.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
그는 속으로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하고 생각할 수 있거든.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는다면,
그에게는 갑자기 모든 별들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그게 중요하지 않단 말이야?”


파랗게 질린 어린왕자의 외침을 읽을 때마다 목구멍에 돌이 꽉 낀 것처럼 숨이 막혔다. 마치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너는 사랑하는 꽃이 있긴 하니?

어쩌면 이미 사라져버린 건 아니야?

뭐가 중요한지 알고 있긴 하느냔 말이야?


조급해졌다. 어린왕자도 아는 생의 기쁨이 여전히 사막 속의 숨겨진 샘을 찾는 것처럼 어려웠다. 답답한 마음에 편지를 썼다.


어린왕자, 나는 무엇을 혼동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책임져야 할 장미는 어디에 있지?


받을 수 없는 답장 대신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읽히지 않던 문장들이 어느 날인가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린왕자가 하루에 마흔 두 번이나 석양을 볼 만큼 외로웠다는 것과 장미가 자신의 별에 뿌려주는 향기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것. 그리고 장미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떠나버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


어린왕자가 가진 것만 보느라 놓친 문장들이었다. 어린왕자의 외로움과 후회를 알아차리고 나니 그제야 조급함과 부러움대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나 한 가지씩의 어리석음은 갖고 있으며 무언가를 잃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는 걸 알려주어서.


이번엔 고마움을 담아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썼다. 어차피 답장은 받지 못할 테고, 여전히 장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집에 있는 종이들을 활용해 봉투를 만들어 붙이고, 여러 장의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펜으로 편지글을 옮겨 적었다.
지워지지 않는 잉크에 펜촉을 담가가며 천천히 한 자 한 자 쓰고, 그린 편지와 그림.



어린왕자, 가끔 네게 편지를 쓰곤 했어.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처럼 막막한 순간. 너에게 물어보면 답을 줄 것 같았거든.


그런데 말야. 네가 준건 답이 아니었어.

대신 내가 무엇인가를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하고, 들여다보게 만들었지. 내가 떠나보낸 것들과 떠나간 것들, 그리고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너는 이미 보여주었던거야.

소중한 것들을 찾기 위한 여정은 서로 다른 행성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그 곳에서 만난 이들만큼이나 낯설며 독사에게 발목을 내어줄 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어.

우리 모두는 그처럼 먼 여행을 떠난 후에야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걸. 결국 필요한 건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떠나는 용기겠지.


고마워, 어린왕자.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아직도 나는 여행 중이지만, 네가 아니었다면 떠날 용기조차 얻지 못했을 테니까.


첫 브런치북이라 목차 구성이 잘못 되었음을 뒤늦게 발견하였습니다. 이 글은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글이거든요. 어떻게 맨 뒤로 갈 걸 맨 앞에 넣었는지 너무 한심하지만....한 번 발행된 브런치북은 목차 순서 수정이 불가능 하더군요ㅜㅜ 원래대로라면 첫 목차는 바로 이 글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01화 => 나 자신을 그린다는 것


정체성이 희석되는 걸 참을 수 없어서 삼십대에 두 아이를 키우며 도전한 미대입시와 그 후의 세 번에 이은 실패기는 다른 매거진에 실었습니다.


미대입시 실패기와 브런치북의 일상적 그림그리기 이후 이야기 => 이제 그림은 안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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