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응에 서운했을 남편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사랑’이 말로 전달된다고 믿지 않는 나로선 그 말이 도저히 입 밖에 나오질 않았다. 마치 나 자신과 그를 기만하는 것 같아서.
우리는 왜 그토록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그 것이 사랑의 증거라고 믿는걸까. 그를 바라보며 그리는 동안 내 안에는 사랑이 충만했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만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상대방도 그렇게 말해주어야만 만족하는 이들도. 눈빛이나 말투, 손의 떨림 같은 다양한 감각 대신 언어로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겐 사랑이 '언어'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공포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의존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질투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책임과 의무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자기연민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사랑받지 못함에 대한 괴로움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겸손이 자만의 반대인 것만큼 사랑은 증오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 .... 사랑은 새롭고, 신선하고,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생각의 혼란 저 편에 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사랑이 ‘생각의 혼란 저 편’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사랑이 이성(언어)으로 판단하고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사랑은 과거의 기억 속에 있지도 않으며 언제나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미래의 약속에도 있지 않으며 오로지 매 순간순간 살아 움직이며 온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그의 말대로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없다면, 우리는 굳이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랑해'라는 말은 그저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을 상대방에게 드러내고자 할 때 가장 표현하기 쉽고, 편리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니까.
언어는 의사를 표현하는 명확한 도구지만, 누군가 내뱉는 말이 모두 다 진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그가 망설이며 말하지는 않았는지, 평소보다 과장된 목소리는 아니었는지, 떨고 있는지, 눈은 마주치고 있는지, 이런 많은 감각적 요소들이 모두 진실과 연결되어 있다.
언어 이외의 요소가 70% 이상 감정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과학적 검증을 통해 누구나 아는 시대가 되었지만, 사랑이 생각의 혼란 저 편(생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에 있다고 말했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통찰은 놀랍다.
언젠가, 평소보다 잠에서 일찍 깬 날이었다. 아이들은 몸부림을 치던 자세로 아직 잠들어 있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잔잔한 아침햇살이 들어와 방은 노란빛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때 난 평화롭게 잠든 이 어린 존재들에게 감탄했었던 것 같다.
너희들, 참 사랑스럽구나.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아이들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나의 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영혼으로서. 참 사랑스러웠다. 나는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곤히 자는 아이들을 조용히 관찰하며 그렸다. 그게 나에게는 ‘사랑한다는 말’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