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믿는다는 것

지리산 가는 길2

by 안녕

울산 터미널 대합실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어지럽고 몸이 떨렸다. 눈을 비비고 눈 앞에 보이는 글자들을 읽어보았다. 김밥, 우동, 라면. 분명 한글을 읽을 수 있는데. 어쩌다 지리산 대신 울산에 오게 되었을까.


퍼즐을 맞추어 보았다. 인월행 버스가 출발하는 게이트는 34번. 지리산, 울산 방면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다. 타려던 버스는 7시 출발행이었고, 나는 5분 전 게이트에 도착했다. 그 게이트에 선 버스로 사람들이 타고 있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버스 앞에 섰고, 티켓을 받는 이는 습관대로 티켓을 끊었다. 티켓 모양은 어차피 같았을 것이고, 어떤 멍청한 인간이 행선지도 확인하지 않고 타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버스가 지리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는 신호는 탈 때부터 있었다.


일단 예매할 때만 해도 분명 매진이었던 버스에 빈 좌석이 많았다. 하지만 뒤쪽이 텅 빈 버스를 보고 내가 한 생각은 '예매를 취소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군.'이었다. 내가 잘못 탔을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유난스럽게 등산복을 차려입은 내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보다 캐리어를 끌고, 힐을 신은 사람을 보며 지리산행 준비가 안 되었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게다가 예상보다 도착 시간이 2시간이나 더 걸리는데도 차가 막힌 거라고만 생각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나선 뒤 지리산과 전혀 상관없는 프랜차이즈 간판들이 줄줄이 보였을 때도 다른 도시로 향하고 있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울산에 도착했다.




원효대사가 어두운 동굴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울산 터미널 대합실에서 충격을 받은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는 순간 모든 것을 그 믿음에 맞추어 합리화시킨다는 걸 깨닫고 나니, 내가 하는 모든 판단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나를 헛똑똑이라고 부르던 아버지의 말이 참 듣기 싫었는데, '나는 헛똑똑이가 맞는구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터미널 창구의 티켓 판매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인월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바로 가는 거 없어요. 대구나 진주로 가셔야 돼요."

"아... 네"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진주보다는 그나마 대구로 가는 게 가깝다. 결국 대구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의정부에서 지리산 가는 길이 이토록 멀다니. 새벽 5시도 안 되어 집에서 나왔건만 해가 중천에 뜨도록 울산에서 이게 뭐람. 오늘 구경하려던 인월 장터도, 한 번 들러볼까 했던 실상사도, 꼭 걷고 싶던 둘레길 3코스도, 모두 물 건너갔다. 버스 안에서 황금 같은 연휴의 하루를 허비하는 셈이었다.


내일은 흐리고 모레는 비가 온다고 했는데. 제대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건 오늘뿐이었는데. 마흔 하나에 버스 하나도 제대로 못 타 다니!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B612_20170503_125903.jpg 인월에서 먹으려고 보리밥집까지 검색해놨건만, 울산 터미널에서 생수와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게 될 줄이야.


숙소에는 체크인이 늦어질 것 같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주인장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다 큰 어른이 버스도 탈 줄 몰라서 엉뚱한 터미널에 가는 경우가 어디 흔한가. 지하철을 타고 의정부 오려다가 술에 취해 인천까지 갔다 온 남편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던 나였는데. 지리산 간다고 호기롭게 출발해놓고선 울산에 도착한 사실을 알면, 남편은 뭐라고 할까.




대구행 버스에 앉자마자 노트와 펜을 꺼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좀 전까지 있었던 일을 휘갈기며 써 내려갔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 같았다.


4페이지에 걸쳐 써 내려간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이래서 인간은 겸손해야 하는구나.


B612_20170503_132416.jpg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자기 이해를 전문가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풀어가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중 가장 손쉬운 하나'가 글쓰기라고 한 은유 작가의 말은 참말이었다.


1시 20분에 울산을 출발해 대구를 거쳐 인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아직 해가 남아 있었지만 다른 곳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인월에서 다시 한번 숙소 근처로 가는 버스를 타고 주인장이 알려준 곳에서 픽업을 기다렸다. 한적한 2차선 도로의 작은 정거장 앞으로 흰색 사륜구동이 오더니 멈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더니 말을 건넸다.


"예약하신 분이시죠?"

"네"

"타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 고생을 한 터라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차를 타고 5분쯤 달리자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중턱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흰 털이 북슬북슬하게 자란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반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B612_20170503_185656.jpg 게스트하우스에서 기르는 개답게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6인실 도미토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마당 한 편에 놓인 원목 테이블과 장독대,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은 해먹, 사람을 따르는 커다란 개, 그리고 숙소 건너편으로 녹음이 짙어지는 산자락까지. 드디어 지리산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집에서 나선 지 무려 12시간 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B612_20170504_074719.jpg


'지리산 가는 길'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단...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