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실수로 놓쳐버린 지리산의 첫 날을 만회하기 위해 서둘러 등산복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숙소 1층에 자리한 카페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주인장은 조식으로 내놓을 샌드위치를 만드느라 바빠 보였다. 회사 동료와 함께 온 사람들, 딸과 함께 왔다는 엄마, 나처럼 혼자 온 여행자들이 각자 카페에서 평화로운 지리산의 아침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주인장이 만든 샌드위치 한 접시를 들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얇게 채친 양배추와 마요네즈 소스가 들어간 야채 샌드위치다. 평소 샌드위치를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음식이라 그런지 우유 한 잔과 맛있게 먹었다.
샌드위치 진짜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맛있다.
식사가 끝나가는 데 지난밤 함께 바비큐 식사 자리에서 반대쪽 모서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사람들에게 커피를 사고 싶단다. 이 숙소의 인싸를 자처하는 건가. 말 한마디 안 섞어본 남에게 커피를 얻어 마시는 건 좀 찜찜한데.
“대신 저한테 한 마디만 해주세요.”
공짜 커피이긴 하지만 조건이 있단다.
“철아, 고마워.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커피 사드릴게요.”
철이라면, 메텔과 함께 우주를 여행하던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복고 분위기를 왕창 느끼게 만드는 아련한 그 이름. 아마 그의 이름도 ‘철’로 끝나는 모양이군, 생각하던 그때.
“철아, 고마워. 잘 마실게”
카페를 울리는 크고 낭랑한 목소리. 낯 두껍게 얼굴 한 번 본 게 다인 이에게 커피 얻어마시겠다고 말 떨어지기 무섭게 '철이'를 부르는 사람.
나였다. 지하철에 떨어진 사람을 보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를 구해낸 의인이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어요’ 라던 게 이런 걸까. 정말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몸속에 들어와 내뱉는 말 같았다.
남한테 폐 끼치는 일은 절대 못 하고, 부탁도 거절하기 힘들어하는 데다 도움받는 일도 부담스러워서 괜찮다고 하는 타인 경계형 내성적 기질의 끝판왕이 나였는데! 신혼 시절, 사람들의 호의와 도움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며 한 소리하던 남편이 알면 이중인격자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아무렴 어떠냐는 듯 속도 없이 잘 마시겠다던 내 말에 카페 안의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었다. 물론 '철이'도.
세 마디 말로 얻어 마신 아메리카노 한 잔.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며 살아생전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아버지의 훈육이 새삼 와 닿는다.
주인장은 곧장 커피를 내려주었다. 하얀 머그잔에 향이 좋은 아메리카노가 담겨 나온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뒤통수가 약간 신경 쓰였지만 공짜 커피라 그런 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커피까지 마시고 드디어 지리산 둘레길로 향하는 길, 사람들이 왜 혼자 떠나라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 자신도 모르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거라던 의미도.
지리산 둘레길 3코스는 남원 인월-함양 금계까지 총 20.2km의 거리로 하루 만에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인월에서 7.3km 지점에 위치한 숙소에서부터 나머지 구간을 걸었다
아마 남편이 옆에 있었다면, 커피 한 잔 얻어먹겠다고 모르는 남자에게 그렇게 쉽게 이름을 부르진 못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건 공짜 커피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직관적으로 공감했다. 누구의 엄마, 누구 아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삶을 누르는 수많은 의무와 역할과 책임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롭고 싶은 마음, 왜 모르겠는가. 그래서 나도 떠난 건 데.
"철아, 고마워~잘 마실게"라는 말에 기분 좋게 웃던 철이 아저씨. 메텔로부터 은하철도 999 티켓을 받고 좋아하던 '철이'의 얼굴로 대신~ 원작 : 은하철도 999_마츠모토 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