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언니와 톡을 주고받다가 고향에 리조트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리조트였다. 집 근처의 약수터로 외지인들이 관광 삼아 오기는 했지만 내 기억 속의 고향은 시골 촌구석에 불과했다. 읍내인 우리 집까지도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다닐까 말까 한 촌동네. 그렇잖아도 일주일 사이 고향집이 나오는 꿈을 두 번이나 꾼 터라 집을 한 번 가볼까 싶었는데, 리조트가 생겼다는 소식에 덜컥 숙소부터 예약했다.
다음 날 아이들에게 엄마의 고향에 가려고 하는데 혹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지금껏 외가댁에 가본 적이 없다. 결혼 초부터 명절에 맏이가 어딜 가느냐는 시댁 어른들의 호령에 친정엘 가지 못했고, 나 역시 이틀을 시댁에서 자며 명절 음식을 차리고 치우는 일을 하고 나면 쉬고 싶은 마음뿐이라 친정행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린 두 아이와 너무 먼 거리, 불편한 욕실과 화장실 등. 늙은 아버지가 혼자 지내는 시골집은 마음에서 늘 먼 곳이었다. 그러다 건강이 나빠진 아버지가 병원, 둘째 오빠와 언니네, 큰 오빠 집으로 거처를 옮겨가시느라 빈집이 되면서 더욱 고향에는 갈 일이 없어졌다.
큰 아이는 엄마가 살던 집과 방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말에 놀라며 되물었다.
“진짜?”
지금껏 여섯 번의 이사를 하며 아파트에서만 살아보았으니 그럴 만했다.
“가보고 싶긴 한데 시험 끝나고 친구들이랑 놀기로 해서...”
시험이 끝나는 날 친구들과 놀기로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단다. 결국 큰 아이는 집에 남고 둘째가 체험학습 신청서를 쓰고 동행하기로 했다. 꼭 내려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이틀간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것이 주요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동행자가 생겼다.
언니에게도 연락해 숙소를 예약했으니 시간이 되면 놀러 오라고 톡을 보냈다. 언니가 합류하기로 하면서 인원이 세 명이 되었다. 숙소의 정원은 다섯 명. 만만한 둘째 오빠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혹시 빨간 날이라 쉬면 오라고. 일을 해야 한다던 둘째 오빠가 며칠 뒤 태풍으로 인해 일을 쉬게 되었다며 동참하면서 최종 네 명의 멤버가 고향길에 오르게 되었다.
고향인 청송으로 내려가는 10월 2일. 태풍 ‘미탁’의 북상이 예보된 날이었다. 오전 8시가 안되어 의정부에서 동서울터미널까지 택시를 탔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터미널까지 가기엔 아이와 너무 힘들 것 같았고, 막내 오빠가 보내 준 숙소비와 택시비로 경비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서울에서 안동까지는 대략 세 시간.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안동터미널에 도착했다. 안동은 이미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터미널에서 삼십 분을 기다리니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둘째 오빠가 영천에 사는 언니를 태우고 안동까지 온 것이다. 여섯 형제 중 세 형제가 만난 셈인데 이런 조합은 처음이었다. 차라곤 몰 줄 모르는 두 여동생이 고향을 간다고 하니 오빠가 운전기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오빠가 청송이 아닌 안동에서 만나자고 한 목적은 하회마을 때문이었다. 전화로 “니 하회마을 가봤나?” 하고 물어볼 때부터 계획한 모양이었다.
하회마을을 가기 전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빠가 미리 식당을 알아두었는데 식당 이름이 헛제삿밥이다. 도시에서는 먹기 힘든 메뉴지만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데다 다음 주면 시아버님 제사를 치를 내게는 흔한 음식이었다.
잠시 후 상이 차려진다. 제기에 담아 나오는 제수용 전과 탕국, 삼색 나물, 그리고 추가로 주문한 소고기 산적까지. 먹는 동안 고기라곤 귀했던 예전 시절 이야기가 오간다.
“우리 때는 제사 아니면 고기를 못 먹었어.”
옛 추억에 젖어 내가 한 마디 하자 매일 한 끼는 고기반찬을 먹는 딸내미가 뭔 소리야,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요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내가 늙은 꼰대가 되는 순간이다. 나 역시 아버지가 겪었던 일제 치하며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면, 저런 옛날 얘기는 왜 자꾸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내가 아이 앞에서 그러고 있다.
식당을 나서 하회마을로 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이런 날씨에 꼭 가야 하나 싶었지만 오빠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또 언제 이래 오겠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쉽게 다음을 기약하지만 그다음이 정말로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십 대에 결혼한 내가 사십 대가 되어서야 고향을 찾아온 것처럼 또 언제 우리가 이 곳을 함께 올 수 있을까. 오십 대인 언니와 오빠도 어느새 칠십 대, 팔십 대가 될 거고, 그때의 건강과 경제적 여유 또한 어떨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운전대를 잡은 오빠가 하는 말이니 언니와 나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하회마을 주차장은 한산했다. 오빠가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끊었다. 각자 우산을 하나씩 챙겨 들고 마을로 들어가는 셔틀버스를 타니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도 여행을 취소할 수 없었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여럿 타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라고 쓰인 커다란 비석이 마을 입구에 보인다.
마을로 걸어가는 길. 산에 걸친 안개와 옛 풍경을 간직한 마을이 단정하고 운치 있다. 벼가 자라는 탁 트인 논을 둘러싼 산새도 아담하고 예쁘다.
비 내리는 안동 하회마을의 평화로운 풍경.
집집마다 자라는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주홍빛 감은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대문이 열린 어느 집 마당에도 감나무와 수세미, 조롱박이 자라고 있다. 감나무 아래 떨어진 감들을 보고 언니가 말한다. 아이고, 아까워라. 오빠는 이미 떨어진 감 하나를 주워 쪼갠 뒤 우리 앞에 내민다. 아직 홍시처럼 과육이 붉고 투명하진 않지만 제법 익은 감이다. 떨어진 거니 먹어도 되겠지 싶어 넙죽 받아먹었다. 생각보다 달진 않다.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거냐고 아이가 묻는다.
“동네 사람들이 관광객들 오면 먹으라고 이렇게 문을 열어놓고 키우는 거 같은데? 안 그럼 손대지 마시오,라고 표지판이라도 붙여 놨겠지.”
평소의 나라면 그 감을 줍거나 먹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오빠가 쪼개어 준 것을 먹은 나로선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오빠는 떨어진 감 두 개를 더 주워 양 주머니에 하나씩 넣는다. 뒤늦게 마당에 들어선 할머니가 뭐라 하시며 타박을 준다. 일부러 딴 게 아니라 떨어진 것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어쩐지 어릴 적 서리하다 걸린 것처럼 창피한 기분이다. 떨어진 감도 이 마을의 소유인 것은 분명하니까. 마을 입장에선 떨어진 감을 공짜로 생각하는 우리 같은 관광객이 어디 한두 명이랴. 어쩌면 부러 따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마당을 나와 류성룡을 기리는 충효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이자 ‘징비록’을 지은 류성룡은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먹을 것이 떨어지는 날이 많고 말년에 자손에게 물려줄 변변한 집조차 없었다 한다. 지금 같으면 일급 공무원이나 다름없는데 얼마나 청렴하게 산 걸까. 풍산 류 씨 후손이 아닌데도 안타깝다. 요즘이라면 최소한 강남에 집 한 채쯤은 자식에게 남겼으련만.
빗물이 고인 마당은 고즈넉하다. 언니가 쓴 빨간 우산과 기와집이 수백 년의 시간차를 만들어 낸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짧은 찰나, 지나간 시간과 떠난 이들을 떠올려본다.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버지의 어머니와 아버지.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연결된 존재인지를 가늠해본다. 유한한 내가 무한을 꿈꾸는 순간이다.
나의 이름을 그들의 긴 시간 속에 이어 붙이고 아이들에게로 이어 보는 것.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 기록하고 다시 들여다보는 것. 안다. 모두 영원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을 달래려는 작은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바란다.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뿌리를 기억하듯, 아이들도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며 살기를. 그러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내가 존재하듯,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존재하게 될 테니까.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추억은 소중하다고 여기는 이중적 태도 속에는 그런 바람이 들어 있다. 아이였던 내가 사십 대가 되어 아이의 손을 잡고 고향집을 찾아가는 것 또한 이런 바람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