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는 꽤 변한 상태였다. 인근에 모텔들이 들어섰고, 길도 넓어졌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삼촌 집은 벽에 붉은 벽돌을 덧붙여 예전과 달라 보였다. 좀 더 단단하고 견고해 보였다. 도시에 살면서 가끔 삼촌댁을 떠올릴 때마다 마당에 자라던 자두나무가 생각나곤 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자두가 많이 달리던 나무였는데 한 여름이 지나 노란빛으로 바뀌어 익기 시작한 자두는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매일 학교를 오가며 마을 입구에 자라는 그 자두나무를 볼 때마다 사촌들이나 삼촌이 그 자두를 따서 좀 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의 내 기억에는 얻어먹은 기억이 없다. 결국 딱 한 번 자두를 몰래 따먹었었다. 덜 익은 탓에 달지 않고 새콤한 맛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런 새콤한 과일은 좋아하지도 않는데 언젠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꼭 자두나무를 심으리라는 막연한 바람은 순전히 그 자두나무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마을 초입의 삼촌집을 지나 몇 분 정도만 걸어가면 우리 집이다. 오빠가 집 근처에 차를 세웠다. 친구네 집 왼쪽을 따라 난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 회색 새시가 닫힌 어둑한 집이 보인다.
집은 내가 네 살 되던 무렵 지어졌다. 사십 년쯤 흐른 셈이다. 기억 속의 집은 담장 아래 작은 채송화들이 피어 있다. 앞집을 가르는 기다란 담벼락에는 키 큰 달리아와 해바라기가 자란다.
마당에 꽃들이 활짝 피어있던 어린 시절의 집
작은 방 앞쪽에 시멘트로 지은 창고에는 호미나 낫, 농기구들과 깨를 털 때 쓰던 키, 홍시를 가지런히 놓아두던 갈대발 같은 온갖 물건들이 가득했다. 창고의 위쪽은 계단을 이어 옥상으로 연결된다. 낮은 옥상이지만 건너편 논밭과 먼 산이 훤히 보일만큼 전망이 좋았다.
ㄱ자로 지어진 집은 왼쪽부터 부엌, 안방, 마루를 지나 뒷방과 앞으로 튀어나온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이 꺾이는 모서리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마당보다 조금 높게 신발을 벗어두는 턱이 있고 집의 하부는 몇 층의 붉은 벽돌이 가로로 둘러져 있다. 마당에서 집으로 들어가려면 시멘트로 마감된 턱을 올라가서 신발을 벗고 불투명한 유리가 덧대어진 미닫이문을 열고 마루로 올라서야 한다.
마당에서 발을 짜는 아버지와 미닫이문에 기대어 구경하는 나. 예전 집은 나무로 된 문들과 붉은 벽돌의 색감 덕분에 따스한 느낌이 든다.
마당 왼편으로는 밭일을 마치고 온 부모님이 흙 묻은 장화를 씻거나 세수를 하던 수돗가가 있다. 수돗가를 지나면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부엌은 방이나 마루보다 깊이가 한참 낮았다. 아궁이와 구들 때문이었다. 부뚜막에는 아궁이가 두 개 있었는데 오른쪽의 큰 아궁이 위에는 밥 짓는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무쇠솥에 밥을 하고 만들어지는 누룽지를 밥그릇 옆에 조금씩 떼어주었다.
부엌에는 희미하지만 여러 가지 기억이 남아 있다. 식재료를 저장하던 부뚜막 맞은편의 창고와 수도꼭지가 달려 있고 물을 받아서 쓰던 네모난 물통, 미원이 들어 있던 짙은 갈색의 찬장 같은 것들.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 냄새와 맛.
일꾼들에게 주려고 찐 술빵에서 오르던 김이며 소풍 가는 날 하얀 쌀밥에 넣어 비벼주던 참기름 냄새, 차갑게 식은 풀빵의 쫀득한 식감, 김장 항아리에서 막 꺼낸 커다란 김장무의 얼큰한 냄새와 아삭한 맛. 무밖에 안 들어갔는데도 구수하던 된장국. 연탄불에 석쇠로 구워주던 자반고등어와 아궁이에 남은 불로 구워주던 고구마, 닭목이나 닭발만 모아 볶아주던 볶음탕. 밑반찬으로 두고 먹던 깻잎 장아찌와 무말랭이. 이가 없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칼국수와 김치를 넣고 푹 끓인 수제비. 내가 기억하는 집에는 부모님과 따뜻한 음식, 그 옆에서 함께 숟가락을 든 내가 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루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 춤을 추며 놀거나 안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군용 담요를 깔아놓고 10원뺑이 화투를 치는 날이면 나도 괜히 들뜨곤 했다. 심부름으로 커피 2숟가락, 프림 2숟가락, 설탕 2숟가락을 넣어 커피를 타서 갖다 드리기도 하고 잠깐 화장실에 간 아버지를 대신해 화투패를 들고 있기도 했다. 복작거리는 어른들 틈에서 긴 머리를 매만질 때면 “뒤에 눈도 없는데 어예 저래 머리를 혼자 잘 묶노?” 하며 신기해하던 어느 아주머니의 말도 기억난다.
주말에는 가끔 부모님을 따라 가메골 밭에 가서 놀았다. 황토집에서 참을 먹고 나면 밭 언저리에 자라는 새파란 개복숭아 나무 열매를 따먹거나 도라지 밭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두 분은 구름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서 묵묵히 고추를 따고 또 땄다. 그것은 평화로우면서도 지루한 풍경이었다. 별달리 할 일도 없는 산골에서 때로는 하늘을 바라보고 때로는 풀이나 뽑던 시절.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17년 만에 찾아온 집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되었다. 부뚜막이 있던 부엌은 싱크대가 들어선 신식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고, 안방에서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면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하던 다락으로 향하던 문도 벽지를 발라 막아버렸다. 겨울 땔감이 가지런히 쌓여있던 뒤란으로 향하던 부엌의 문도 없어지고 황초집과 감나무도 사라졌다. 부모님의 삶을 지탱하고 우리를 길러낸 곳이 이제는 죽음을 앞둔 노인처럼 적막하다. 마당에 자라는 식물들만이 집을 숨 쉬게 하는 유일한 생명이다.
이제는 옆집 아주머니(이제는 할머니가 되셨지만)가 우리 집 마당에 텃밭을 일구고 계신다.
중, 고등학교 시절 6년 동안 쓰던 방에 남은 내 물건이라고는 액자 두 개뿐이다. 반들거리던 마루에는 누런 장판이 깔렸고, 뒷방에는 시커먼 곰팡이가 가득 피었다. 안방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쓰던 옷장과 티브이가 남았다. 옷장 안에는 아버지가 매던 넥타이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일일이 손으로 매야 하는 넥타이들이다.
나는 아버지께 넥타이 매는 법을 배웠다. 고등학교 입학 후 셔츠에 넥타이를 매야 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알려주셨다. 결혼 후 문상이나 예식을 갈 때 보니 남편은 넥타이를 맬 줄 몰랐다. 그럴 때면 아버지에게 배운 방법으로 넥타이를 매 주곤 했다. 넥타이 매는 법 말고도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몇 가지 있다. 남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것과 인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쥐를 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배운 '사람 노릇'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쓰던 방. 중학교 시절의 그림과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던 시로 학교에서 만들어 준 액자가 아직도 걸려 있다.
옷장에는 앨범과 아버지의 까만 수첩도 있었다. 수첩 뒷부분에는 자식들의 생일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태어난 시간이 새벽 4시라는 건 이 수첩을 보고 처음 알았다.
앨범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예전 사진들이 꽤 남았다. 큰 오빠의 결혼식 날 찍은 사진도 두어 장 보인다. 이날 양복과 한복을 입은 부모님의 모습은 아마도 두 분이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 아닐까 싶다. 그 후 엄마는 무릎 수술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으니까.
그렇게 엄마가 집을 떠나고, 학교를 졸업한 내가 집을 떠났다. 그후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도 집을 떠나 자식들의 집과 병원을 오가다 돌아가셨다. 제 발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만 집만 이 곳에 그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