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물려받은 유산

청송 가는 길 3

by 안녕


집을 나와 엄마의 묘소로 향했다. 마을을 빠져나온 차가 아스파트 도로를 따라 잠깐 달리다 우회전한다. 논시골로 가는 길이다. 길이 전보다 많이 넓어졌다. 차가 다시 왼쪽의 좁은 시멘트 길을 오른다. 위쪽에 하우스가 보이고 오르막길에 개 두 마리를 만났다. 한 마리는 앞발을 들며 짖고 한 마리는 우두커니 차를 지켜본다.


야산 입구에 차를 세우고 오빠가 간단히 제를 지낼 물품을 챙겼다. 읍내에서 산 막걸리 한 병과 배 한 개, 사과 한 개, 복숭아 한 개, 그리고 대추 몇 알. 밑에 깔 빨간 등산용 수건도 챙겼다. 자주 묘소를 다녀간 오빠가 먼저 앞장을 선다. 비가 온 후라 묘소로 올라가는 길이 질척거렸다. 웃자란 풀을 밟아가며 따라갔다. 신발은 이미 진흙이 잔뜩 묻었다. 오랜만이지만 변한 게 별로 없어서인지 가는 길이 눈에 익다. 산이 낮아 금세 묘소에 도착했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왔던 게 마지막이니 십칠 년 만이다.


오빠가 묘 앞에 수건을 깔고 과일을 놓는다. 막걸리 뚜껑을 따더니 내게 잔을 건넨다.


“니가 한 잔 올리라.”


잔을 받아 과일 옆에 놓고 언니, 나, 작은 딸, 이렇게 셋이 절을 했다. 절을 하고 일어나 술을 묘에 골고루 뿌렸다. 제는 간단히 끝났다. 병에 남은 나머지 술을 마저 뿌리고 잠시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언제 다시 엄마 묘소에 술을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다. 열세 살이었던 내가 마흔셋이 되었으니.


한때는 엄마와 하지 못한 것들이 참 아쉬웠다. 외식, 나들이, 쇼핑, 여행 같은 소소한 것들. 대부분의 엄마와 딸들이 하는 평범한 일상 말이다. 친정에서 직접 기른 채소들이나 친정엄마가 만든 음식을 싸오는 다른 사람들이 가끔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많은 것들을 무디게 만든다. 나는 더 이상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지 않는다. 별다른 그리움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과 함께 슬픔도 희미해지고,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 기르랴, 먹고살기 바쁘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내 기억은 많지 않다. 일곱 살까지는 기억이 별로 없는 데다 초등학교 생활은 서울에서 했으니 청송으로 전학을 간 4학년 겨울부터 돌아가시기 전 6학년 여름까지가 전부다. 물론 방학 때 시골에 내려와 지내던 기억들도 있지만,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다. 엄마는 그렇게 말씀이 많지 않았고, 내가 어렸기 때문에 주로 혼이 나거나 잔소리를 들었다.


나는 엄마가 어려웠다. 좀 무섭기도 했다. 아침에 늦잠을 자다가 엄마가 부엌에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기만해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저녁에 “일기 썼나?” 하고 물어보면 주섬주섬 일기장을 꺼내 쓰기도 하고, 마당에서 아이들과 놀다가도 엄마가 올 때쯤이면 놀지 않은 척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왜 우등상은 못 타노?” 라거나 꼭 좋은 대학에 가야 된다는 말도 부담스러웠다.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 엄마에게 칭찬받거나 사랑받았다는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조차 엄마를 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린 나를 서울로 학교 보내면서 두고 갈 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나를 낳은 뒤 엄마가 이불로 감싸서 엎어 놓았는데 아버지가 발견하고 그랬단다. 낳은 애를 어떻게 그러냐고. 다시 풀어헤쳐서 내가 너를 살렸다고.


나중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엄마는 왜 그랬을까. 원하지 않던 아이였던 나를 키우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오빠들만 지내던 작은 월세방으로 나를 올려 보낸 걸까? 아이를 이미 다섯이나 기른 엄마에게 마흔에 낳은 여섯째를 키우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을 테니까. 풍족하지 않은 시골 살림에 여섯이나 되는 자식,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오는 중년의 몸. 큰 애만 결혼하면 헤어지자며 싸우던 아버지와의 관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나는 ‘엄마’가 아닌 한 사람의 인생으로 엄마를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엄마가 나를 낳은 마흔 즈음. 이전과 다른 눈으로 엄마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마 엄마는 내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길 바라셨던 것 같다. 나를 엄마의 곁인 청송이 아니라 서울의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넓은 곳에서 많이 배우고 자유롭고 풍족한 삶을 누리라고. 자신은 누리지 못한 도시에서의 배움과 자유, 그리고 다른 삶 말이다. 그제야 익숙한 삶의 자리가 아닌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 엄마가 고마웠다.


나는 평범한 일상에 안주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과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마치 엄마가 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삶의 경계를 확장시키기 위해 애쓴다. 겨우 쉰셋에 생을 마감한 엄마의 나이를 세어보며, 내가 그 나이까지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한다.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살고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혼자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품과 나고 자란 곳을 여덟 살에 떠나 본 경험이 있는 내게 낯선 곳을 혼자 가는 것은 그리 무서운 일이 아니다. 서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고, 고향인 청송은 인구가 3만 명도 채 되지 않는 농촌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두 곳은 참 멀다.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지닌 먼 거리의 두 도시를 오가던 경험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씩씩하게 해내는 힘을 길러주었다. 내 삶을 이끌어가는 든든한 밑천인 미래를 꿈꾸는 힘도.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다.


빨래를 널던 옥상에 올라오면 마을 앞의 논과 산새가 훤히 보이던 시골집. 엄마와 함께 했던 어린시절이 기억나지 않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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