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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11. 2020

6년차 넷북에게 이별을 고하며

이게 너를 통해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거야

이 글을 쓰기 위해 한글 창을 띄우는데 십 초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타이핑한 글자가 화면에 나타나는 데는 오 초쯤 걸렸다. 제조한지는 7년 차, 사용한지는 6년 차. 비싼 노트북대신 3년간의 할부로 장만한 넷북이 해가 갈수록 느려지고 있다. 설치한 프로그램이라고는 겨우 한글뿐인데.


저장해둔 글들이 사라지진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이용해왔지만, 새로운 노트북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처럼 기술과 디자인이 빨리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6년 된 IT 제품이라니. 훨씬 가볍고, 얇고, 빠르고, 예쁜 노트북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게다가 말이 넷북이지, 인터넷 검색용으로는 사용하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어쩌다 밖에서 글을 쓰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서 이 녀석으로 인터넷을 이용해야 될 때면 깊은 심호흡과 함께 창을 띄워야 한다. 클릭 후의 엄청난 기다림과 기다림, 기다림을 견뎌낼 수 있을 때만 인터넷창을 열어야 한다.    


난생처음 혼자 서울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놓고 1순위로 챙겨간 물건이 바로 이 넷북이었다. 아이들도 없고, 설거지거리도 없는 여행지에서 글을 써보고 싶은 게 로망이라면 로망이었던 때였다. 하지만 내 소망은 1박 2일간 가방에 든 넷북이 벽돌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기이한 체험을 한 이후 산산조각 났다.


결국 그 해 가을에 혼자 떠난 제주 여행지에서 나와 함께 한 건 넷북이 아니라 200g이 될까 말까 한 작은 노트와 만년필 한 자루였다.    

  

운전도 못하는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날때 가방에 넣어간 건 무거운 넷북이 아닌 노트와 펜이었다.


다시는 어떤 여행이라도 이 넷북과는 함께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러다 집 안에서조차 전원을 켜는 일이 뜸해졌다. 뭐라도 좀 써볼까 하고 전원을 켜면 수시로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창이 떴다. 그리곤 몇 십분 간 꺼지지도 않은 채 저 혼자 업데이트를 진행했다.     




한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넷북에 일기를 쓰곤 했었다.

 

마을카페에서 문서 작업을 할 때나, 독서 모임 회원들과 나들이를 갈 때도, 차가 있는 남편과 갔던 강릉 여행지에도 함게 했던 2011년 산 S사 넷북.


요즘은 전원 버튼을 누르거나 가방에 넣어서 집 밖을 나오는 일이 헤어지기로 결심한 애인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마음먹기를 여러 번. 그런데 뭘까. 자꾸만 망설여지는 이 마음은.      


아직 글자를 칠 수는 있잖아? 저장도 되고. 

한 10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인지 도전인지 모를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오랜만에 넷북을 켜고 D드라이브에 저장해 둔 글들을 하나씩 클릭해서 읽어본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몇 편의 소설들, 비슷한 시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에세이, 감정적으로 마구 써 내려간 일기와 부치지 못할 편지들과 산만한 회의록들. 참 많이도 썼다. 그동안 내가 쏟아낸 감정들을 처리하느라 고생했겠구나 싶다.


하지만 이젠 안다. 백스페이스조차 되지 않는 넷북과는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이 글이 이제 너를 통해 쓰는 마지막 글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한동안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내가 힘들 때마다 항상 내 곁에 있어준 친구니까. 모든 글을 다른 곳에 다 옮긴다 해도 함께 했던 모든 추억은 내 안에 남아있을 거니까.          


이제는 새 노트북이 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나의 방황과 불안을 견디도록 도와준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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