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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13. 2020

서가에 꽂힌 책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도장집에서 마주친 문학 애호가

서류에 직인이 필요해서 도장집을 찾았다.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지하철역 앞 도장집이었다. 도장 팔 일이 그리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되는대로 아무 데나 가다 보니 같은 도장집을 두 번 이상은 간 적이 없다.


오늘 방문한 도장 집도 처음 가는 곳이었다. 밖에서 유리문을 똑똑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머리칼이 희끗한 사장님이 “어서 오세요” 하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의 도장집은 비좁은 공간에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이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닥 한쪽에 일렬로 자리한 생수병부터 가스버너, 전기주전자, 에어컨과 겨울용 히터까지 사계절을 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거기다 도장뿐 아니라 열쇠제작과 구두 닦기까지 세 가지 업무가 가능한 공간이다 보니 온갖 물품이 출입문을 제외한 3면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했다.      


“직인 좀 맞추려고요. 3만 원짜리로요.”

“네, 3만 원이 제일 기본이에요. 거기 잠깐만 앉으세요. 단체 이름이 뭔가요?”

“네 0000요.”     


아저씨는 한 줄로도 쓴 걸 보여주고, 두 줄로 나누어 쓴 것도 보여주면서 묻는다.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아, 두 줄로 나누어서 쓴 걸로 해주세요.”     


그리곤 또 이어지는 질문.      


“그럼 글씨체는 이 중에 어떤 걸로 하실래요?”     


모니터 화면에 서로 다른 글꼴의 여덟 가지 도안이 주르륵 나타났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글꼴 디자인을 비교해보고 그중에 한 가지를 가리켰다.  

   

“이 걸로 해주세요.”     


이렇게 글꼴까지 선택할 수 있도록 물어봐주는 도장집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난다. 대부분은 그냥 알아서 해주었던 것 같다. 세심한 배려와 친절이 느껴지는 도장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선택을 끝내고 기계가 도장을 파는 동안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밖은 후덥지근한데 좁은 실내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선선하고 쾌적했다.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안을 둘러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낮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두꺼운 책 한 권.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돈키호테 1>. 총 2권 세트,  <돈키호테 1>만 해도 784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출처_알라딘)


성서 다음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였다. 전 세계를 뒤집어 봐도 <돈키호테>보다 더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찬사를 받은 소설.


벽돌만큼 두꺼운 양장본 사이에는 딱 보아도 지하철역에 위치한 000 백화점 상품권의 봉투가 꽂혀있었다. 저렇게 두꺼운 문학책이 도장집 한가운데 떡하니 놓여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백화점 상품권 봉투를 책갈피처럼 꽂아 놓은 것도 특이했다. 마치 '나한테 이깟 백화점 상품권은 워낙 흔한 것이어서 이렇게 책갈피로나 쓴다오.' 하는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 오른쪽을 보니 내가 앉은 의자 옆에도 족히 삼십 권은 될법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목민심서>,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의 거장 빅또르 위고 필생의 역작인 <레미제라블>. 책등이 거꾸로 있어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태백산맥> <안네의 일기>, 영화 헝거 게임의 원작 소설 <모킹제이>까지. 그는 분명 문학 애호가였다.      


막 쌓아놓은 것 같으면서도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책들. 믹스커피 박스와 갑 티슈 사이에 가지런히 쌓인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레미제라블> 5권


그곳에 놓인 책들로 인해 나는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인 도장집 주인이 좀 특별하게 보였다. 의견을 꼼꼼히 물어가며 글꼴을 정한 것조차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여겨졌다.


가게 안의 책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동안 도장이 완성되었다. 그가 인주에 도장을 찍어 종이에 꾹 찍어 확인해보더니 휴지로 도장을 닦아 건넨다.


“자, 다 됐습니다.”


도장을 받아 가방 안에 넣고 도장값을 지불했다.


“간이 영수증 하나 써주실 수 있으세요?”

“네”            



집에 와서 다시 살펴보니 한컴의 양재 튼튼채를 닮은 듯도 한 영수증 글씨. 뭔가 귀엽다.


그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낮은 테이블에 대고 영수증을 쓴다. 천천히 또박또박. 사업자등록번호는 없다며 내미는 영수증 글씨가 참 단아하다. ‘역시 문학적이야.’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오며 다시 한번 가게를 바라보았다. 다른 도장집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평범한 가게였다. 하지만 나는 아주 잠깐, 누군가의 서가를 엿본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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