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S 대학원에 마을공동체 전공이란 게 생겼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호기심이 일었다. 지역에서 동네 엄마들과 마을도서관도 만들고 마을카페도 차리며 10년 넘게 활동해왔지만, 이게 전문성이나 학술적인 영역의 일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막연히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터라 더 그랬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제 막 생긴 학과라 별다른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신생학과이니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고, 나 역시 조건이 숙성될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학비 마련과 중학생인 두 아이들을 두고 저녁에 학교에 가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2년의 기다림 끝에 큰 아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2018년 겨울,S대 사회적경제대학원에 마을공동체 전공으로 지원서를 접수했다. 수업계획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그간의 활동을 돌아보았다.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며 동네 언니들과 함께 했던 6년간의 마을도서관 활동. 그리고 7년째 접어든 마을카페. 어린이집을 다니던 아이들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이십 대를 지나 사십 대가 되었다.
현재 코로나 사태로 문을 닫은 마을카페. 주민들과 함께 운영하는 주민커뮤니티공간인 이 곳에서 무임금 카페지기로 일한지 7년이 되었다. 월급 없는 일터이자 놀이터.
나는 십여 년이 넘는 마을에서의 일과 놀이에 대한 의미를 찾고 싶었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며 느낀 여러 문제의식과 비전을 대학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비슷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연대도 하고 싶었다. 마을공동체 활동이 어떤 학문적 이론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궁금했고, 사람들에게 마을에서 놀고먹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똑 부러지게 설명하고 싶었다.
대학원 입학 후 1학기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를 갔다. 전공 필수 두 과목과 전공 선택 두 과목. 오후 6시 넘어서 시작한 수업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집에서 대학원까지 오가는 시간만 왕복 4시간. 집에 돌아오면 밤 12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대학원 수업의 고단함은 다음 날까지 이어지고 과제나 발표라도 해야 하는 날에는 긴장과 피곤함이 더했다.
대학원 수업과 마을을 구체적으로 연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는 함께 마을카페를 운영하는 30대 엄마가묻는다.
“대체 대학원에서 뭘 배워요? 우리한테도 좀 알려줘요”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스스로도 정리가 안될뿐더러 대학원에서 배우는 이론과 사례가 우리 현장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다음 주에 있을 마을 부엌 메뉴를 정하고 재료를 사고, 주민들을 모집해야 하는데 대학원에서배운 주제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캐나다 퀘벡의 협동조합 사례. 이런 식이다. 우리 활동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건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불투명했다.
한 학기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내린 결론은 이랬다. 대학원이 답을 주는 곳은 아니며 활동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것. 우리 활동의 비전을 찾는 키도 우리가 쥐고 있다는 것. 대학원은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동기와 계기를 마련해줄 뿐, 어떠한 정리된 결론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당신 활동의 의미는 이러이러하고, 마을카페의 문제는 이렇게 해야 해결이 되겠군요”라고 알려 줄 이는 어디에도 없다. 공부를 시작한 나의 몫인 셈이다.
어영부영 한 학기가 끝났다. 나름 꼬박꼬박 출석하고 내라는 과제는 최선을 다해서 냈지만 강의 계획서에 있는 교재와 자료를 다 읽지 못한 채 수업을 들은 날이 부지기수.
수업시간에 졸지 않으려고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수업 내용을 기록했다. 손가락을 두드리지 않으면 금세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졸리기 때문이었다. 기록하려면 어쩔 수 없이 교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해야 한다. 또 논리적으로 글이 되게끔 정리해야 하니 머리도 굴려야 한다.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 좋아하던 책도 전공 관련 책은 하나도 재미가 없고, 난생처음 읽고 분석해보는 논문들은 또 어찌 그리 난해한지. 매주 쪽글을 써서 내고 소논문을 쓰면서 이게 정말 내 길이 맞나 하는 회의도 여러 번 들었다.
전공으로 읽은 책들과 매주 쪽글 과제로 힘들었던 마을공동체 입문 수업
어쨌든 시간은 흘러 한 학기가 끝나고 대학원 1학기 성적 발표일! 성적 장학금도 없는 학교라 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학원 성적은 보는 데도 없다던데.
학생회 활동을 하며 학부 때 올 F를 받고 제적을 당했을 때도 “내 인생에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어”를 외쳤던 내가 성적확인을 앞두고 떨리다니. 어렵게 독학사로 학위를 따고 마흔 넘어 다니는 대학원에서 남들 다 받는다는(인터넷에 누군가 후기로 쓴 걸 읽어보니) A를 못 받으면 어째 서운할 것 같았다.
학사 종합시스템에 학번과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왼쪽 카테고리를 훑어서 성적확인을 찾았다. 잠깐 뜸을 들이고 클릭. 기대했던 성적 대신 강의평가서 항목이 뜬다. 강의 평가를 먼저 해야만 성적확인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한 학기 동안 들은 네 과목에 대한 평가를 작성하고 다시 심호흡을 한 뒤 성적확인을 클릭했다.
마을공동체 입문 A+
마을공동체와 교육 문화 A+
도시재생과 공공정책 A+
사회연대경제와 지역사회 A+
내 평생 처음 받아보는 올 A+이다. 성적장학금이 없다는 게 이리 아쉬울 수가(ㅜㅜ)하긴. 성적장학금이 없어서 이렇게 후하게 성적을 주는 건가? 아님 내가 정말 잘 한 건가? 남들 다 받는 A라니 어디 자랑할 수도 없고.(그래도 A와 A+은 차이가 있다고 들었다.)
성적이 너무 잘 나오니 그냥 출석만 해도 다 주는 성적인가 싶었지만, 딱 한 명 자랑할 데가 생각났다. 남편. 성적 화면을 캡처해서 보냈다. 잠시 후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먹고 싶은 거 없냐는 답신이 왔다. 딱 하루만 성적 잘 나온 분위기를 즐겨야지 싶어 아이들에게도 자랑했다.
“얘들아, 엄마 전 과목 A+ 받았다!아빠가 맛있는 거 사준대!!”
(예상 반응 : "우와 진짜? 엄마 대단하다!!!" )
그러나 대학을 다녀보지 못한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
“아.. 그래?”
대학이었다면 전과목 A+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구구절절 설명했겠지만, 대학원 올 A+이라 관두었다. 어쨌든 남편이 밖에서 배달시켜준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며 대학원 첫 학기 A+자랑은 끝났다.
그 후 방중 논문세미나 수업과 2학기 전공 4과목에서도 역시 올 A+을 받았지만, 아예 가족들에겐 알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주임교수추천 장학금을 신청하면서 조금은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이 올 A+덕분이었다.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내고, 꽤 많은 시간과 체력까지 투자해가며 다니는 대학원이지만 석사학위가 불안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안다.
대학원 공부는 어떤 씨앗이 싹을 틔울지 알 수 없으면서도 농부가 뿌리는 수많은 씨앗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학문적 비전, 일자리로의 연결, 관계망의 확장. 무엇이 싹을 틔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학자가 될 인간은 못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년간 공부한 과정과 그 경험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라던 일을 해보고 나면 얻게 되는 힘도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최소한 나중에 '해볼 걸'하는 후회도 없을 테고. 어떤 일이든 해보고 나면 알게 되니까. 이 일이 나한테 맞는지, 아닌지. 혹은 즐거움을 주는지, 안 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