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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14. 2020

오늘은 도저히 글을 못 쓰겠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글쓰기

일요일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공식 일정이 없는 날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오랜만에 일정이 없는 날이니 늦잠은 필수.


늦은 아침까지 이부자리에서 뒹굴며 늦잠을 만끽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시간은 오전 11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몽롱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오늘의 뉴스를 잠깐 살펴본다. 어차피 이런 멍한 상태로는 글을 쓸 수 없으니까.      


스마트폰 화면의 포털 사이트 앱을 누른다. 몇 개의 기사를 클릭하다 어느새 연예뉴스란에 흠뻑 심취한 나를 발견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삼십분이 훌쩍 지나갔다.


잠시 페이스북으로 이동한다. 지인들의 소소한 소식들이 손가락을 따라 줄줄이 딸려 올라온다.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며칠간 페이스북의 소식을 오늘 안에 다 읽긴 힘들 것 같다. 머리도 조금 맑아진 것 같아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글을 쓰려고 식탁에 앉았다가 거실 공기가 갑갑해서 베란다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어젯밤 물을 주느라 바닥에 내려놓은 화초가 보인다. 사놓고 한 번도 물을 안 준 탓에 시들시들한 걸 어제 부랴부랴 물을 주었는데 아침에 보니 잎이 다시 생생히 살아났다. 원래 있던 자리에 화초를 올려두고 하늘을 한 번 바라본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허기가 진다. 어제저녁 밥을 제대로 안 먹은 게 생각났다. 글쓰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사과 하나를 꺼내 깍아서 접시에 담았다. 음, 사과만으로는 부족한데? 당근을 썰고, 계란 두 개를 삶았다. 이 정도면 아침식사로 해결하기에 충분하군.     


차려진 음식을 먹으려는 찰나, 콧물이 난다. 환절기 때마다 비염 때문에 고생하다가 약을 먹고 이제 좀 잦아드나 했는데 아직도 아침에는 맑은 콧물이 종종 난다. 갑자기 시어머니께서 주신 마늘꿀이 생각난다. 면역력에 좋으니 열심히 먹으라고 주셨는데. 어쩐지 한 숟가락 먹어야 할 것 같다.      


무거운 마늘꿀 병을 냉장고에서 낑낑대며 꺼냈다. 뚜껑을 여는데 꿀의 끈적임 때문인지 열리질 않는다. 고무장갑을 끼고 병을 끌어안은 채 돌렸더니 그제야 열린다. 한 숟가락 떠서 꿀꺽 삼키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냉장고에 넣고 식탁에 앉아 한글창을 띄우려는 순간, 내일 오전까지 보내주기로 한 시안이 생각난다. (암, 돈 받는 일이 우선이지!) 일러스트레이터를 열고 작업을 마무리하는 동안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시안 파일까지 만들어놓고, 드디어 글을 쓰려던 찰나. 마을카페에서 지원하는 공모사업 서류도 한 번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근을 씹어 먹으며 서류를 다시 훑터 본다. 계란까지  해치우고 나니 이제 배가 부르다.

   

업무 처리도 끝나고 아침도 다 먹었는데..도대체 글은 언제 쓰는 거니? 응?


드디어! 노트북에 한글창을 띄운다. 어제 일을 떠올리며 한 줄 두 줄 빈 여백을 채워간다.


몇 줄 쓰고 나니 시간은 벌써 낮 시다. 맞다, 오늘 큰 아이가 2시까지 수학 공부방을 간다고 했는데! 몇 줄 쓰다 말고 벌떡 일어나 아이 방문을 두드렸다.


"너 오늘 공부방 간다며!?" 

"응... 오후 5시로 밀렸어..."


잠결에 대답하는 목소리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다음 문장을 쓴다.      


부엌쪽 식탁 모서리는 내 고정석이다. 이제 고요히 차를 마시며 글을 줄줄 써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잠이 깬 큰 아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식탁 앞에 앉는다.(음..앉지 마, 앉지 마. 집중 안돼.)


"엄마, 나 귀 밑이 부었어"


모른 척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개를 들어 자세히 보니 오른쪽 편도선이 꽤 많이 부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 피곤과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면역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일요일이라 병원도 문을 닫았고.


한글창을 내리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편도선이 붓는 이유. 편도선에 좋은 음식. 도라지, 모과, 매실, 생강, 배... 다른 건 없고 집에 있는 매실액을 따라서 한 잔 희석해서 건넸다.


"그냥 밥 먹고 싶은데"


그러고보니 점심 시간이다. 어제 저녁 외식할 때 남아서 포장해온 날치알 볶음밥과 목살 스테이크를 가위로 잘라 한 그릇에 담아 데웠다. 김치는 조금 썰어서 따로 담고 점심상을 간단히  차렸다.


냉동실에 있는 작은 아이스팩 하나를 꺼내 손수건에 감아 편도선에 대어주었다. 아이는 한 손에는 얼음팩을, 한 손에는 숟가락을 쥐고 밥을 먹는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어디까지 썼더라. 그러니까...     


그때 둘째가 방에서 나오더니 식탁에 앉으며 말한다.      


“나도 배고파.”   

   

차릴 때 같이 안먹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큰 아이에게 차려주었던 것대로 똑같이 차려준다.      


좀전에 써둔 문장들을 읽어보고 이어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오늘은 꼭 빨래를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일주일 내내 바빠서 미뤄두었는데 오늘마저 돌리지 않으면 당장 머리 감고 물기 닦을 수건도 없을 판이었다.    

  

뒷 베란다로 가서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밥을 먹는 아이들에게도 빨래 거리를 넣으라고 말했다. 세제를 넣고 전원 버튼을 누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세탁기는 저절로 돌아가고 아이들이 밥을 먹는 동안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얼추 한 페이지가 채워져 가는데 문득 아까 양치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난다. (왜 뭔가가 자꾸 생각나는 것이냐...)얼른 화장실로 가 양치를 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아이들이 먹고 남은 그릇들이 식탁 위에 노트북과 함께 놓여 있다. 이대로는 글쓰기에 집중이 안 된다.


그릇들을 싱크대로 가져간다. 설거지를 끝내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까지 모두 버리고 나니 음식물 쓰레기통 옆에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려고 둔 라면 세 봉지가 보인다. 하는 김에 해야지 싶어 가위로 비닐들을 다 잘라내고 안에 내용물을 음식물쓰레기에 버린다. 스프 봉지까지 모두 잘라서 스프들을 털어내고 비닐은 재활용 비닐을 모아놓은 큰 봉지에 담았다. 이제 끝났다. 쓰던 글을 마무리하자.    


쓰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어째 정리가 안 되고 산만하다. 단락들을 옮기고 문장들을 다듬는다.    

  

큰 아이는 사주기만하면 공부가 잘 될 것 같다던 독서실 책상을 놔두고 굳이 식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시작한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생에게도 질문하고 나에게도 질문한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한 마디 했다.      


“엄마, 지금 글 쓰는 중이라 집중이 안 되는데 그만 물을래?”      


아이가 입을 다문다.       


머릿속에서 ‘청소기도 돌려야 하는데, 오늘 아니면 또 못 돌리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또 생각이...) 조금 미루기로 하고 다시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면서 몇 줄을 더 쓴다.      


따라-라-라아-라라 라라라라-라-라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고 멜로디로 소식을 알린다. 이제 빨래를 널어야 한다. 조금만 있다가 널기로 하자. 다시 문서 창을 쳐다본다. 망했다. 다음 글이 이어지질 않는다.


기분전환 삼아 일요일마다 버리는 재활용쓰레기나 버리러 갔다 와야겠다 싶어 옷을 갈아입는다.  

    

그후 아이들이 먹을 과일을 깎아 주고,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렸다.


오후 네 시가 지난 시각.

서서히 피곤과 졸음이 몰려온다. 일요일은 아무리 늦잠을 자도 또 졸린다. 이럴 땐 별다른 수가 없다. 자야 한다.


자고 일어나니 여섯 시가 넘었다.  이제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저녁식사를 차리고, 먹고, 치우고 나니 일요일의 끄트머리. 정리되지 않은 글을 쓴 문서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노트북 뚜껑을 덮는다.


아, 오늘은 도저히 못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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