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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15. 2020

댓글 읽기가 무서워졌다.

공감과 오지랖 사이

지난 일요일. 글 하나가 조회수 16만을 찍었다. 전화통화에서 오빠가 한 말을 그대로 제목으로 지은 돈에 관한 글이었다.  차분히 새로운 글을 쓰려던 계획이 이 일로 틀어졌다. 예전에 메인에 배치되었을 때는 조회수 말고는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라이킷과 구독도 늘고 댓글도 계속 달렸다. 결국 정신을 못 차리고 새로운 글을 쓸 집중력을 잃어버렸다.


다음 어디에 배치되었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머니'였다.



이 글의 흐름은 이렇다. 오빠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천만 원이 없냐고 물었고, 늘 그렇듯 나에겐 돈이 없었다. 오빠에게 돈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글에도 쓰지 않았다. 다만 오빠에게 대학시절과 결혼 시절 받은 도움이 생각나서 천만 원이 있다면 빌려줄게 아니라 그냥 주어도 아깝지 않을 거라고 썼다.


그리고 그동안 지역에서 방과 후 무료 공부방과 마을카페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도움을 주었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글의 핵심은 뒷부분이었고, 전하고 싶었던 주제 '돈에 대한 긍정적 가치의 재발견'이었다. 그 메시지를 풀어가기 위해 앞에 오빠와의 전화통화 일화를 잠깐 언급한 거였다. 조금은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 적당한 펭수짤과 로또 사진을 첨부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회수가 올라갈수록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떤 분이 오빠와의 일화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왜 오빠에게 돈 갚을 생각은 하지 않느냐, 매달 얼마씩이라도 모아서 갚아야 한다. 대략 이런 뉘앙스의 내용이었다. 나는 글에서 오빠에게 '도움'을 받았었다고 썼는데 그걸 갚아야 할 '빚'으로 해석하는 것 같았다.  '로또가 되면 꼭...'이라고 유머로 넣은 사진설명에 대해서도 언젠가 갚겠다(는 식의 막연한 다짐)는 건 로또가 되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나무랐다.


오빠와의 일화에 대한 다른 댓글도 있었다.


'도움받으며 사셨는데, 그 도움에 보답도 못하고... 저라면 적은 돈이라도 오빠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을 거 같은데, 결국 본인을 위한 선택이 아닐까 싶은데, 댓글에 칭찬이 너무 많네요.'


이런 반응은 글을 쓸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댓글을 읽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내가 왜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오빠에게 빚을 갚을 생각을 해본 적 없느냐'는 책망을 들어야 하나. 글 한편에 소개된 짧은 단락만 읽고 나와 오빠와의 관계를 어떻게 다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댓글을 남긴 걸까. 마음이 답답했다.  


브런치에 에세이를 쓰고 있는 작가님들은 알 것이다. 한 편의 글에서 어떤 에피소드와 인물이 등장할 때 모든 전후 맥락과 사정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걸. 이번 글은 (물론 필력이 부족한 내 탓도 있겠지만) 가족이 포함된 이야기이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의 뒷이야기까지 실으면 분량도 너무 길어진다. 더구나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핵심은 글 속에 모두 담았다고 생각했기에 뒷이야기는 굳이 쓰지 않았다.




내가 오빠에게 20여 년 전 도움을 받은 게 단순히 빚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다.


어쩌다 실수로 태어난 여섯째 늦둥이였던 나는 이미 중학생이거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네 명의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큰 오빠가 일찍 장가갔으면 아빠뻘이고, 부모님이 할머니 할아버지쯤 될법한 나이였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 되자 시골 초등학교가 아닌 당시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오빠들에게로 올려 보냈다. 오빠들은 나를 자식처럼 챙겨야만 했다. 그러다 엄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고, 나는 새엄마와 시골에서 힘겨운 사춘기를 보냈다. 내가 학생운동으로 대학시절 학업을 멀리하고 사고를 쳤을 때도 오빠들에게 나는 엄마 정을 못 받고 자란 아픈 손가락이었다. 돌아가신 엄마 대신 막내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대학 때까지 이어졌고, 결혼할 때도 다섯 형제들이 축의금을 모아 막내인 나를 시집보냈다.


그러니까 내가 오빠들로부터 받은 것은 '대학 등록금 000원, 결혼 축의금 000원= 합계 0000, 이자 0.0%' 방식의 빚은 아니었다. 돈이 있다면 오빠에게 빌려줄 게 아니라 그냥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쓴 건, 성공해서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유럽여행 보내주고 싶은 자식의 마음과 비슷한 거였다. 그런데 오빠가 챙겨준 것에 대해 보답하고 싶다는 의미를 '단 십만 원이라도 저축해서 갚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해석하니  조금 억울했다. 나는 오빠에게 돈을 빌린 적이 없는데.


오빠 부부의 맞벌이 수입이 우리 부부의 두 배 이상이기에 당시 전화를 받았을 때에도 생활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그런 문제도 아니었다. 오빠는 다른 사람을 통해 돈을 융통했고, 얼마 후 아버지의 기일에 만나 돈이 필요했던 전후 사정을 들려주었다. 결국 빌려주지도 못했고 오빠가 무뚝뚝하게 전화를 끊긴 했지만, 그런 걸로 형제간의 우애가 금이 갈 정도의 사이는 전혀 아니기 때문에 글에서도 가볍게 언급했던 것이다.   


아니, 뭐 이런 긴 변명과 해명을 대댓글로 달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글에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쓰게 되긴 했지만)


새로 달리는 댓글 읽기가 겁이 나기 시작했다. 브런치 알림에 댓글이 달렸다는 문장이 늘 반가웠는데, 심장이 콩닥거렸다. 새로운 글을 쓰는 것도 자꾸만 부담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저 글을 쓰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글감을 갖고 갈팡질팡 고민에 빠졌다. 이미 오마이뉴스에서 마을카페 이야기를 연재했다가 악플이 달리고 민원신고까지 받고 나서 뉴스 플랫폼에 발길을 끊었는데. 브런치에서도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섣부른 걱정도 들었다.


복잡한 마음에 다른 분들의 글도 요 며칠 읽지 못했다. 읽더라도 댓글을 남기기가 망설여졌다.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신할 수도 없고, '소통'이라는 가면을 쓴 불편한 관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에 글을 읽고 쓰것이 결국 내 삶을 전시하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불과한건 아닌가하는 몹쓸 의구심도 들었다.


글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수록 나와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도 많아진다는 것을 뼈아프게 체감하는 중이다. 어쩌면 브런치에 계속 글을 쓰려면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포털 뉴스마다 달리는 댓글만 봐도 사람의 생각은 무척이나 다양하고,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해석도 천차만별이니까.




몇 시간 후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그 댓글들을 읽어보았다. 분명 그분들에게는 나의 대처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 틀림없다. 어쩌면 가족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받지 못한 개인적 경험이 있을 수도 있고, 평소 계산이 철두철미한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의 이야기가 도움을 받고도 갚을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태도쯤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해석은 본인의 몫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마저 내가 뭐라 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댓글들이 유독 내 마음을 건드린 이유는 무엇일까.  식탁과 소파 사이를 왔다 갔다, 한숨을 쉬었다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가, 댓글을 노려보다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첫째, 나는 오빠에게 그 은혜를 갚을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고민해본 적이 없다. 적은 돈으로라도 오빠에게 보답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다는 지적은  맞는 말이었다.


둘째, 나도 다른 작가의 글을 읽었을 때 단편적인 것에 꽂혀 내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주관적 경험에 근거한 충고나 조언을 많이 썼다. 나도 누군가에게 공감과 응원 이상의 오지랖을 부렸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후련해졌다. 글을 읽는 입장에선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해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늘 공감이 가득한 따뜻한 댓글만 보다가 따끔한 댓글을 마주하니 나름 새로운 통찰이 열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분들께 나름의 해명+감사의 댓글을 남기고 나서 어제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 풀이 죽고 겁을 먹긴 했지만. 글쓰기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댓글로 조금 아팠지만, 그것도 분명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이고 거기에도 분명 배울 점이 있었으니까. (댓글을 남긴 분의 브런치에 가서 글을 읽어봤더니 이미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경제적 자립도 어느 정도 일군 똑 부러지는 분이었다. 내 딸도 이렇게 살았으면 싶을 정도였다.) 




사족 1.


궁금해하지도 않을 이야기겠지만 굳이 밝히자면. 내가 가족과 금전거래를 한 것은 결혼 전 카드빚 400만 원을 해결하느라 언니에게 빌려 쓰고 그로부터 7년 후에야 갚은 일 한 번뿐이다. 생활고로 남편의 카드빚이 500만 원이 되었을 때 시할아버님께 빌려 쓰고 2년간 월 20만 원씩 갚은 적도 있긴 하다. 여하튼 가족이든 지인이든 금전거래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하고, 오빠에게 빌려 줄 게 아니라 그냥 주어도 될 만큼 받은 게 많다고 표현한 것도 금전거래로보다 그냥 주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다.  


사족 2.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가 쓴 ‘선물’에 관한 원시부족 비교 연구서인 <증여론>에는 트로브리얀드 군도에서 행해지는 쿨라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섬에서는 선물이 증여자와 답례자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섬 전체를 돌며 선순환한다. 가령 A가 팔찌를 B에게 선물하면, B는 그것의 답례를 A가 아니라 C에게 한다. 그리고 C는 그것을 D에게 한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하는 것이다. A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는 공동체 안의 신뢰가 있다면 별다른 문제가 아니다.


근대의 산물인 ‘교환’의 개념 틀로 따지면 당장 상대방에게 받지 못할 선물을 하는 이런 행위는 어리석고 손해 보는 짓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역에서 방과 후 무료 공부방과 마을도서관, 마을카페에 이르기까지 지역공동체 활동을 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런 선순환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나 역시 7년간 무임금 카페지기로 카페를 운영하며 재능과 노동, 시간, 에너지, 경험, 정보에서부터 물건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나눌 수 있는 건 다 나누었고, 다른 이들 또한 자신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이 모든 나눔은 결코 1:1 방식이 아니었다. 마치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처럼 받을 걸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주는 방식이었다.  마치 트로브리얀드섬의 원주민들처럼 말이다.




[출처]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은이), 이상률 (옮긴이) /2002

[고전 다시 읽기] ‘선물’은 부족 공동체 묶는 끈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75446.html#csidx8ba614f2b6de4c7aed954826a95a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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