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아까 왜 그랬어?”
가로등 주황색 빛이 드문드문 내린 길에 깡통 하나를 저 멀리 차버렸다. 빈 깡통이 여기저기 부딪히는 소리가 깡깡처럼 들려 가을이 살풋 웃었다. 웃기냐. 자신의 질문이 웃음으로 뭉개진 것으로 착각한 현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가을은 아니라고 대답하는 대신 한 번 더 웃고 현하를 쳐다보았다.
위로 올린 머리가 익숙하지 않은지 슬슬 만져보던 현하가 무스로 뻣뻣하진 머리를 건들다 곧 포기한다. 깔끔히 정리된 눈썹과 이마로부터 이어진 날이 선 콧대가 눈에 띈다. 잘 뻗은 콧대 덕에 현하는 앞모습보다 옆모습이 더 볼만 했다. 거의 매일 보는 얼굴이라 익숙해졌지만 이따금씩 주변 이들의 사심 담긴 평가를 듣고 있노라면 간간히 기억나는 것이다. 이놈이 잘생기긴 잘생겼구나… 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네온사인들이 현하의 얼굴을 수놓는다. 형광빛으로 물든 얼굴이 다시 가을을 향했다.
“왜? 뭐 묻었어?”
“음, 어. 묻었네.”
“아, 잘생…….”
“못생김.”
“…….”
“못생김.”
웃으며 장난치려던 현하의 말을 잘라먹고 다시 한 번 더 못을 박는 가을에 현하는 이내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지는 척하며 울상을 짓는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 더 얄미워 장난을 받아주기가 싫었다. 가을은 제 손으로 투박하게 현하의 얼굴을 쓸었다.
“아, 아까 그거 왜 그랬냐니까?”
쓸어내린 얼굴은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받는 사람 없이 사라져 버린 제 질문에 속이 상해 심통난 표정이라 이제 슬슬 답을 해주어야 했다. 이놈은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못해서 한 번만 더 제 질문을 무시했단 며칠간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사람을 귀찮게 했다.
“아까?”
“소개팅 무슨 말이냐고. 진짜 할 거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집중하던 가을이 이내 관심이 떨어진 듯 표정을 풀었다. 아아, 그거. 가을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몇 시간 전을 떠올렸다.
-
길게 이어지는 식탁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큰 함성과 함께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나다 곧 가까이 있는 사람들끼리 저마다 웃으며 떠드는 이야기들이 합쳐져 즐거운 소음을 만들었다. 가을은 한바탕 웃고 난 후의 정적을 틈타 현하를 보고 있었다. 폭탄주를 만든다며 소주와 맥주를 붓고 젓가락으로 회오리를 만드는 게 잘 안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멍청이. 뭐가 재밌냐며 툭툭 치는 재은에게 가을은 집중하느라 입까지 벌리고 있는 현하를 가리켰다. 바보라며 연신 웃던 재은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근데 현하는 왜 여자친구가 없대? 아니면 비밀연애 같은 거 하고 있나?”
“글쎄요. 제가 알기론 없다고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 걸 다 털어놔보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가을을 쳐다보는 재은에 본인도 모르는 비밀연애를 하고 있을 수도 있죠 하며 웃어넘겼다. 그게 또 재밌었는지 재은이 박수까지 치며 넘어간다. 여자친구가 있는 강현하. 여자친구가 있는. ‘여자친구’와 ‘강현하’가 같이 공존하는 문장이란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설익은 문장에 두 번 머릿속으로 되뇌이다 그만두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였다. 여자친구가 없는 게 더 완벽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온전히 가을의 소망일 뿐이었지만. 씁쓸해하던 가을에 잔이 비었다며 재은이 소주병을 들고 다가온다. 찰랑이는 잔을 보고 표면장력을 외치며 뿌듯해하는 재은에 선배…하며 우는 소리를 내다 그냥 냅다 들이부었다. 으, 쓰다.
“현하 마음에 두는 애들 많잖아.”
“저 놈은 관심 없어 보이던데, 아직 애라서 그런가봐요.”
“설마, 게이는 아니겠지? 음, 무성애자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재은을 보며 가을은 어깨를 으쓱 올릴 뿐이었다. 인권에 관심이 많은 선배. 정 많고 따뜻하고 재밌고 여러모로 참 좋은 사람이라고 가을은 생각했다. 이따금씩 여성인권 문제가 주제에 오를 때면 현하와 폭풍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는 강현하 좀 본받으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곤 했었다. 다시 떠오른 현하 생각에 가을은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요새 자꾸 이런다. 기승전 강현하. 병 수준이야. 좀 덜 보던가 해야지.
“아니, 친한 동생이 현하 좀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내가 너무 자랑을 해 놔서 그런가, 솔직히 저런 애가 대한민국에서 흔하진 않잖아. 얼굴 잘생겨, 키 커, 몸 좋아, 사상 올곧아……. 그렇죠. 가을은 고개를 끄덕이며 떨떠름하게 웃었다. 진짜 좋은 놈이긴 하지, 그래서 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을이 생각들을 접겠다는 듯이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근데 저 놈 아마 생각 없을 거예요. 얼마 전에 엄청 예쁜 애가 대시했는데 아직 사귈 생각이 없다나.”
“그래도 아니면 그냥 친구로라도 남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친한 동생이 현하와의 소개팅을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었다. 재은은 현하와의 소개팅을 물릴 생각이 없어보이고 가을은 현하를 소개팅으로 보낼 생각이 없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재은이 포기할 만한 선택을. 짧은 시간 머릿속을 분주히 움직이던 가을은 한 가지 선택에 마주했다. 이 방법 밖엔 없을까, 다른 방법은…….
“일단 현하한테 물어나 보고…….”
“제가 할래요, 소개팅!”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재은의 말을 끊느라 다급히 외쳤던 게 하필 그 많은 인원들 중 대부분이 조용히 술을 따르거나 마시고 있을 때일 것은 또 무엇인가. 소개팅, 소개팅… 메아리처럼 울리는 듯 한 환청에 가을은 집에 가고 싶어졌다. 집에 그냥 가버릴까, 생각하다 현실적으로 이 상황을 수습하기로 맘 먹었다.
“아, 요새 외롭더라고요. 그래서 안 그래도 선배한테 소개팅 시켜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딱! 역시 선배.”
엄지를 치켜세우며 자신이 했던 말은 제가 생각해도 오버스러웠다. 나중에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거짓말쟁이. 자신을 비난하는 또 다른 자신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도 이런 방법을 원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말해도 돌아오는 것은 거짓말쟁이 딱지 뿐이었다.
“연애에 관심 없는 현하놈보다 제가 조금 더 낫지 않을까요?”
속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헤헤 웃는 가을에 재은도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 일단 동생한테 물어보고 대답해 줄게. 근데 가을이 너도 연애에 통 관심 없어 보이더니.”
의외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재은을 보고 일단 고비는 넘겼구나 싶었다. 그 친한 동생이라는 사람이 소개팅을 거절해주기를 비는 수 밖에. 가을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리다 현하와 눈이 마주쳤다. 재은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한 쪽 눈썹을 찡그린 채 저를 바라보는 현하에 그냥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그 때 다 듣고 있었나보네. 다시 생각해도 아득해지는 기억에 가을은 집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다시 또 집에 가고 싶어졌다. 응, 소개팅 해야지. 한다고 했는데. 가을은 나름 담담하게 읊어본다.
“너 좀 의욕 없어 보인다?”
“아냐, 피곤해서 그래.”
에이, 아닌데? 너 사실 별로 안 하고 싶은 거지? 깐족거리는 현하에 가을은 순간 울컥했다. 내가 왜 그런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무리수를 세운 건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모두 다 현하 때문이었다. 가을은 이 잘생긴 놈의 훤히 깐 이마를 찰싹 때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래, 이게 다 강현하 때문인데 녀석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이상하게 합리화를 시킨 가을이 손을 뻗어 현하의 이마를 치려는 그 순간에 타이밍 좋게 또 빠져버린다. 폭력쟁이라며 되려 손등을 찰싹 때리는 현하에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려다 그냥 포기했다. 또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가을은 이제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남이 소개팅 한다는데 왜 이리 꼬투리를 잡고 난리야.”
“남이라니, 우리가 남이야? 서운하게.”
“그럼 남 아니고 뭐야.”
“가족이지!”
가을은 내심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좋아하는 사람, 이딴말이라도 뱉어주길 바란거야? 부끄럽고도 서글퍼졌다. 가족. 이쪽에서는 더더욱 사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