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by 놀닻

시작은 연민이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니 불쌍하다. 얼굴에 쓰여진 상처들과 옷깃을 조금만 당기면 보이는 멍들이 안타까웠다. 항상 날이 서 있는 분위기에 다가가서 무언가를 건네면 돌아오는 말은 '꺼져'였다.



서늘한 눈빛에 처음에는 움찔했지만 나중엔 그냥 인사치레처럼 자연스러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친구들은 뭣하러 욕을 얻어먹냐며 나더러 미친놈이라 말했다. 그 소리에도 헤헤하며 계속해서 말을 붙였던 건 오기와 오만함이었다. '나'는 너를 변화시킬 것이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하지만 너는 보기 좋게 내 오만함을 부쉈다. 나를 대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더 날카로웠다. 그즈음 전교에 소문이 싹터 봉우리를 터뜨리려했다. 이민제가 한지훈을 좋아한대.



어이가 없었다. 남고에서 그런 소문이 득될리가 만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것도 담임을 통해서였다. 이상한 소문이 들린다며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던 담임은 얼빠진 표정을 보며 안심하는 듯했다. 부모님 호출되지 않게 행동하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그대로 나갔다.



복도에 나가면 온통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듯했다. 그런 새끼랑 내가 엮이는 게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는 한지훈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비웃음섞인 소리로 한지훈을 들먹이며 알짱거리는 친구들에 정색을 했더니 그 이후로는 비슷한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 몸살을 앓았다. 죽어도 학교에서 죽으라며 집밖으로 내팽겨쳐졌다. 희미한 정신으로 도착한 교실에선 잠만 자다 깨어나보니 양호실이었다. 상태가 영 아니었는지 양호실에 격리해놨다. 처지가 웃겨 실실대다 커튼이 확 쳐지는 소리에 눈을 옮겼다.



한지훈이었다. 한참을 쳐다보기만 하다 초 지나가는 소리가 심장을 울려 운을 떼었다.



"할 말 있어?"



버썩거리는 입술에 맞게 목소리가 갈라져 삑사리가 났다. 물 좀 마실걸. 괜히 민망해져 흠흠하고는 다시 한지훈 쪽을 봤다.



뒷짐만 지고는 계속해서 쳐다보는 꼴이 신경쓰였다. 양호실에 이러고 있다 들키기라도 하면 소문이 기정사실화되는 건 시간문제도 아니었다. 다시 복잡해지는 머리에 두통이 일었다. 짜증도 좀 나고 나가줬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할 말 없으면 꺼져."



사실은 듣는 동안에 계속 쌓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들어보니 심정이 어때-하는 유치한 복수였다. 생각하고 내뱉는 동안 저 안속에서 느껴졌던 묘한 쾌감은 한지훈의 표정과 함께 가라앉았다.



분명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미묘하게 변한 표정에 당황해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한지훈은 뒤돌아 나가버렸다. 숱하게 뱉었던 말들을 고작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상처를 받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도 마음이 안좋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걸-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것이 불을 지폈는지 몇날며칠을 꼬박 아팠다. 부모님도 내 상태를 보고 학교에 가서 죽어라하는 말도 삼키셨다. 내가 내뱉었던 말에 호되이 대가를 치르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변함은 없었다. 여전히 친구놈들은 짜증났고 소문은 나를 겉돌았고 한지훈은 쓸쓸했다.



시간은 나를 붙잡고 달려 졸업을 했다. 계속해서 찜찜함이 따라다녔다. 한지훈에게 그날 일을 사과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다는 결론에 다다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만날 방법은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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