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희랍어 시간』을 읽고
“약 한 달 뒤에 저는 만 54세가 됩니다. 통설에 따라 작가들의 황금기가 보통 50세에서 60세라고 가정한다면 6년이 남은 셈입니다. 물론 70세, 8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모로 행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니, 일단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쓰다 보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6년 동안 다른 쓰고 싶은 책들이 생각나, 어쩌면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세 권씩 앞에 밀려 있는 상상 속 책들을 생각하다 제대로 죽지도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말입니다.” (한강 수상 소감 중 일부 발췌)
나는 ‘죽어도 좋다.’는 표현과 ‘무언가를 생각하다 제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라는 표현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전자는 삶에서 맞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 바로 이 순간에 있다는 현재적 감탄을 담고 있고 후자는 앞으로도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이는 죽음이 아닌 생으로 향하는 두렵고 힘찬 감탄의 표현일 것이다.
작품은 실어증을 겪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희랍어 수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삶에서 교차하는 장면을 담는다. 외부에 결함을 가진 인물들이 제한된 청각과 시각을 통해 역설적으로 서로의 내면을 더욱 깊게 들여다보고 서로를 향한 경계를 허무는 비언어적 소통 방식은 ‘어두운 곳에서 글을 쓸 때, 윗 문장에 아랫 문장을 겹쳐 쓰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넓게 간격을 두는 것처럼(『희랍어 시간』 167p)’ 진행된다.
희랍어는 정교한 문법 체계를 가지며 고대와 현대를 오가는 서구 철학의 사유가 담긴 근원적 언어이다.
어휘가 시대에 따라 현대화되어도 희랍어는 언어적 유산으로서 훼손되지 않는 가치를 지니며, 작품 내에서는 장애에도 훼손되지 않는 ‘인간의 내면’ 혹은 ‘본질’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희랍어를 학습하는 여자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작품 속 두 인물은 희랍어라는 도구를 통해 인생의 고통과 상실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학습을 하고 있는 것이자, 서로가 삶의 원형을 지키기 위한 간접적 조력자인 것이다.
『희랍어 시간』의 서술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두 인물의 서사가 파편적으로 교차하는 방식이다. 독자는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두 인물의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희랍어 시간』 131p)’가 중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은 0부로, 도입부인 1부로 연결되는 구조를 가지는데, 보르헤스의 유언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사실상 결말인 것이다. 나는 서슬 퍼런 칼날이 두 인물 사이의 사라지지 않는 경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칼날이 보르헤스가 가졌던 ‘실명’ 즉, 장애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두 인물 사이에 있는 장애는 단절이 아니라 그들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수상 이전에 한 번 이상 최종 후보에 올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 명단은 50년간 비공개이므로 공식적인 전제 조건이라 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은 이유는 누군가의 성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리 검증되었을 것이라는 믿음이자, 성공이 제한된 사회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인정 욕구 사이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가치 투영의 결과가 아닐지 짐작해 본다.
『희랍어 시간』 속 두 인물이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 서로의 삶을 이어가는 동력이 되었듯이, 한강 작가가 쓰고 싶은 책들 때문에 ‘제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때때로 찾아오는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예측뿐일지도 모른다. 또한 지금 미래가 보이지 않더라도 다행인 것은, 삶과 문학이 깊게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어떤 미래든 읽어볼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첫 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 덕분일 것이다.